그때 우리, 즐거웠잖니?

문제해결에 대한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들···

by 이인미

*Clker-Free-Vector-Images (from Pixabay)





그때 내가 알았던 것


내가 태어났을 때 친할머니는 57세셨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세월은 흘러, 내가 그 나이 되기까지는 대략 4년 반쯤 남겨둔 시점이 됐다. 그리고 지금 할머니는 내 마음속에서만 살아계신다.



내가 어렸을 적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기에 나는 할머니 손에 자랐다.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놀아주기까지, 할머니는 매일 감당하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내게 가끔씩 이런 부탁을 하곤 하셨다. “이리 와서 등 좀 긁어봐라.”



그러면 나는 할머니 옷 속으로 두 손을 넣고 쭉 뻗어 할머니 등을 긁어드렸다. 할머니는 “조금 위. 아니, 조금 많이 위. 아니 왼쪽, 거기 말고 오른쪽···”하며 방향지시를 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등 뒤에 바짝 붙어앉아서 할머니의 음성을 들으며 내 손의 움직임을 조절했다.



할머니의 등을 긁어드리는 실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져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좀’과 ‘좀 많이’의 의미를 터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할머니의 등 가운데 있는 뼈를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내 손 위치를 기준으로 하여 왼쪽과 오른쪽을 살필 수 있어야 함도 알았다. 다시 말하면, 내 손이 할머니 등의 오른쪽 끝에 있을 때는, 할머니가 자신의 척추 오른쪽 어느 부분을 지목할 때에도 “왼쪽!”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던 것이다.



이는 어린 내겐 상당히 큰 배움이었다. 왼쪽과 오른쪽의 영역이 언제나 경직되게 결정되어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것이기 때문이다. 기준을 정가운데에 두지 않을 경우, 오른쪽과 왼쪽 중에서 한쪽이 더 넓게 분포할 수 있음을 나는 그때 확실히 알았다. 전체의 90% 이상을 오른쪽으로 간주할 있는 위치가 존재한다는 것, 즉 상대적 위치감각을 익혔던 것이다.



이 감각적 앎은 나를 더 진보된 앎으로 인도해주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 상대방을 ‘좌파(左派)’로 호명하며 분노할 때 그것의 진짜 의미를 섬세하게 따져볼 안목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좌파 혹은 좌익(左翼)을 지칭하며 비난하는 이들을 볼 때 그 사람의 위치와 관점을 먼저 확인하는 버릇을 갖추는 것은 시민으로서 바람직한 자세 중 하나라 생각된다.





그때 내가 몰랐던 것


그런데, 그 무렵의 나에겐 아무리 궁리해봐도 알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왜 이따금씩 등을 긁어달라고 말하는지 몰랐다. 할머니도 왜 가려운지 모르겠다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놀다가 내 손등으로 기어올라오는 개미떼를 발견하고는 “아하!”하고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곧 “다음 번에 등 긁으라 하시면 그땐 개미를 잡아드려야겠다”는 다짐으로 나아갔다.



마침 그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 등을 긁어드릴 기회(?)가 또다시 찾아왔다. 나는 내 다짐을 실천했다. 할머니 등을 기어다니는 개미를 찾아보려고 할머니 옷 속으로 내 머리를 집어넣었다. 깜깜했다. 그리고 개미는 없었다. 공연히 할머니만 깜짝 놀라게 해드렸다. 나한테서 개미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는 푸하하 웃으셨고, 나도 같이 웃었다.



최근에 여러 검색경로를 통해 살펴보니, 가려움증 유발요인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피부 건조였다. 피부 건조는 연령이 높을수록 심하고, 건조하고 추울 때 더 심하다.



가만 보니 나도 나이 들면서 등을 긁을 일이 좀 더 잦아졌다. 그리고 주로 겨울철에 등이 가렵다. 내 손이 닿을 만한 곳이 가려우면 대충 팔을 뒤로 넘겨 등을 긁어보는데, 노력해도 닿지 않으면 ‘효자손(등긁개)’을 찾는다.



올 겨울, 공교롭게도 집에 효자손이 없다. 대나무 효자손이 대중적이긴 한데 이왕 살 거 편백나무 재질로 된 효자손을 살까? 잠깐 고민을 해본다. 그러나 피부과 의사들은, 피부 가려움증 완화를 위해선 긁지 말고 보습크림을 충분히 발라주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나는, 효자손을 아쉬워할 일이 아니라 보습크림을 충분히 갖춰놓아야겠군,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러고 났더니 문득 할머니 생각이 다시 난다. 50여 년 전, 할머니께서 등을 긁어달라고 나를 부르실 때 나는 등을 긁어드리는 행위에서 멈추지 말았어야 했다. 개미를 찾아보러 할머니 옷 속에 머리를 들이밀 일도 아니었다. 제대로 된 보습크림을 발라드렸어야 했다.





그때, 내가 알거나 모르는 것 너머에 있었던 것


돌아보면,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는 동안 해결방법을 잘 모를 때가 제법 많았던 것 같다. 해결방법 같은 게 아예 밝혀지지 않았던 때도 있었고, 내가 미처 살피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실제로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에 대한 적합한 해결방법을 발견하기까지는 대체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지난해(벌써 ‘지난해’가 되었다니!) 코로나19 백신을 둘러싼 여러 뉴스들에서 우리가 보듯, 임상실험도 필요하고 검증기간도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객관적·과학적 해결방안을 제공받기 이전이어도 그냥 손놓고 지내지는 않는다. 뭔가 이것저것 유용할 만한 행동들을 모색하고 실천한다. 어린 나도 그랬었다. 결과적으로는 오류였지만···.



그런 데다 이미 나와있는 해결방법에 대하여 정반대의 해결방법이 나타나 막상막하 서로 겨루는 사례도 종종 발견된다. 예를 들어 우리 시대 고혈압 환자에게는 달걀 노른자를 허용하는 조언과 금지하는 조언이 공존한다. 달걀을 앞에 두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고혈압 환자들이 제법 많다.



어쨌거나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문제상황과 해결방안에 노출된다. 그런데 가만 보면, 특정한 문제상황에 부딪혀서 힘들 때 해결방법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달랑 두 가지 상황만 전개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두 가지를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는 게 느껴진다. 그 ‘무언가’가 뭘까?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 예기치 않게 누릴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한 감사 같은 것들이 거기 포함되어있지 않을까?



가만히 돌이켜보면, 그때 그 손녀에겐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들이 고맙기만 하다. 할머니 등을 긁어드릴 수 있었던 것, ‘조금 위’와 ‘많이 위’가 얼만큼 차이가 나는지 느꼈던 것, 객관적·물리적 중앙(척추)이 아니라, 주체의 현위치로부터 오른쪽과 왼쪽을 분간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며 피부접촉을 즐겼던 것, 어쭙잖은 해결방법(개미잡이)을 실행해봤던 것들 모두···.



그리고 딱히 장담할 순 없지만 할머니께서 어쩌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기도 하다. 의사들이 알려주는 해결방법이 어떤 건지 우린 알지도 못했지만, ‘그까이꺼’ 안해봤으면 좀 어떠냐? 그때 우리, 즐거웠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