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2): 세상에 나쁜 기억은 없다

기억과 치유의 글쓰기 06

by 이인미

1.

얼마 전 미국 제46대 대통령으로 조 바이든(Joe Biden)이 당선되었다. 여러 신문에 보도된 바 있는데, 바이든의 책상에 만화액자가 놓여있다고 한다. 그 만화는 딕 브라운의 작품으로 두 컷짜리다. 1번 컷, 폭풍우 속에서 한 사람이 “Why me?”라고 외친다. 2번 컷, 그 사람이 “Why not?”이라는 음성을 듣고 있다.


0003050920_002_20201110192205022.jpg 조 바이든 책상에 놓여있는 만화 (출처: 중앙일보)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불행한 사건들을 겪고 나면 사람들은 1번 컷의 사람처럼 외칠 가능성이 높다. “왜 나예요?”라고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의 불행한 경험을 다른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면, 2번 컷의 사람처럼 “왜 넌 안되지?”라는 음성을 듣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


바이든이 그랬다. 아내와 아기(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큰아들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Why me?”를 입에 달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는 “Why not?”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불행한 기억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두 컷 만화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선물해준 것이라 한다. 우리의 글쓰기(기억과 치유)도, 말하자면, 이 두 컷 만화의 길을 따르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2.

글을 쓰면서 옛 기억을 소환하는 작업은 다만 더 잘 기억하자고 착수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의 옛 기억은 현재의 치유를 위해 불려나온다.


글을 쓰면서 치유를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이는, 수술용 메스로 나쁜 기억을 도려내는 것일까? 나쁜 기억을 제거하는 일일까? 마치 항암치료하듯 나쁜 기억을 ‘골라서 죽이자’는 행위일까? 아니다. 동일한 기억에 대하여 해석을 달리 하는 것이 치유다. 나쁜 기억이라 생각되는 ‘그것’을 굳이 끄집어내어,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그것에 붙은 나쁜 기억이라는 이름표를 좋은 기억 혹은 유익한 기억이라는 이름표로 바꿔 달아주는 작업이 곧 치유의 글쓰기다. 하여, 기억과 치유의 글쓰기 안에 들어선 이는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세상에 나쁜 기억은 없다.





3.

떠올렸을 때 불쾌한 마음이 들고, 불안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기억이 있을 수 있다. 상기하기도 싫은 기억 말이다. 그런 기억은 아직은 나쁜 기억으로 간주되지만, 언제까지나 나쁜 기억으로 남아있어야 할 운명을 갖고 있지는 않다.


기억 속에는 사람이 있고, 사물이 있고, 사건이 있다. 나쁜 기억은 이 ‘3사’ 중 어느 하나를 그 중심에 둔다. 사람이 나쁘게 기억되면, 그에 얽힌 사물과 사건이 모두 나쁜 것으로 종합될 수 있다. 사물이 나쁘게 기억되면, 그 사물과 함께 있었던 사람과 사건이 난데없이 나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허나, 현재 상태에서 그 나쁜 기억을 찬찬히 섬세하게 들여다보다 보면, 그 3사 중에서 정말로 어느 요인이 내게 나빴는지, 나빴다면 얼마나 나빴는지, 따져볼 여지가 보인다. 정말 신비로운 인간의 재능이다. 학력과 성별과 재산 여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있는, 주어져있는 재능이다.





4.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과거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그 해석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바이든이 “Why me?”라고 밤낮 물으며 한탄하고만 있었다면, 그의 삶은 어땠을까? 원망과 분노와 체념을 레고블록 쌓듯 쌓아가면서 하루하루,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기분으로 살았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밝은 웃음, 짓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그렇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과거,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잠식하고, 나쁜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저 기분이 나빠지는 것으로 반응한다면, 지금, 현재 또한 지난 과거처럼 불행해진다. 즉, 오늘, 지금 여기에서, 훗날 나쁜 기억으로 상기하게 될 새로운 장면을 창출하여 나쁜 기억의 두께를 더 두껍게 보태고 있는 셈이 된다는 것.





5.

과거의 시점에서 ‘나’는 등장인물이어서 불가피하게 주위 사물과 사람과 사건을 직접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지금 시점에서 ‘나’는 관찰자가 되어 ‘사물, 사람, 사건’을 전체적으로 지켜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훨씬 더 여유를 갖고 과거를 다룰 수 있다.


기억과 치유의 글쓰기는 바로 그러한 여유를 충분히 누리는 작업이다. 혼자 글을 쓸 때는 그 여유를 혼자 조용히 누릴 수 있다. 이것도 나쁘지 않다. 아주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때로는, 혼자 쓴 글을 동료들과 나눌 수도 있다. 내 글을 읽음으로써 공공으로 (in public) 발표하고, 또 남의 글을 읽으며 청취하는 동안, 글자로 다가오는, 다시 말해, 객관화된 나의 기억과 남의 기억을 대하며 만나는 순간, 그 신비로운 일이 (의도치 않았음에도) 부지불식간에 일어난다.


글, 즉 문장으로 표현된 어떤 기억은, 그것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든, 등장인물이 아닌 관찰자로 넘어가게 해주는 ‘기적’을 일으킨다. A+, B- 같은 성적(결과물)으로 환산되지 않을지라도 그 기적은 반드시 있다. 믿고, 출발하자! 참고로, 이 글은 ‘기억과 치유’ 글쓰기 마지막 편인데, ‘출발’과 ‘시작’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끝난 것 같지만 끝난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제 시작이다. ‘기억과 치유’ 글쓰기는 언제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기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