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중에서
외로움은 혼자 있음과 같지 않다. (…) 혼자 있음은 외로움이 될 수 있다. 단 혼자 있는 와중에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버림받을 때 그런 사태가 일어난다.
_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476.
문제 없는 인간은 없다. 때로 문제 없다는 듯 행동할 수는 있다.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도 가능하다. 아예 문제를 못 느끼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 어떤 이가 스스로 완벽하다고 여겨 자신에게 정말로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 자부한다면, 어쩌면 그 사람 자체가 문제일지 모른다. 인간이 겪는 문제 중에는 자아의 경계 밖에서 훅 들어오는 괴롭힘 같은 것도 있고, 자아의 경계 안에서 쑥 올라오는 우울감 같은 것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모든 문제는 결국 내 문제다. 남이 부과한 것인지 내가 자초한 것인지 따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문제는 이미 내 문제가 된다.
그중 ‘외로움’이라는 문제가 있다. 외로움은 개인적인 문제 같지만, 그렇게만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사회적·정치적 문제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까닭이다. 오늘날 외로움은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서 기원하거나, 또는 그런 문제들을 파생시키는, 가장 깊고 굵은 뿌리일지 모른다.
2018년 영국 정부는 ‘외로움부Ministry of Loneliness’를 신설하고, 해당 부서의 장을 체육및시민사회부 장관이 겸직하도록 했다(실질적으로는 차관보급 직무). 국가 차원에서 공적으로 외로움이란 문제를 다루기로 의지를 표명한 최초의 사례 다. 2021년에는 일본 정부가 저출산대책회의 담당 대신(장관)에게 고독고립대책회의 담당 대신을 겸임하도록 조치했 다. 이로써 두 섬나라 모두 외로움 문제를 공적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다만 아쉽게도 해당 각료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그리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는다. 개인들의 외로움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파장에 관한 성명을 때때로 발표하는 정도인 듯하다.
한나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대 초에 외로움의 문제를 정치의 차원에서 깊이 성찰한 정치사상가다. 아렌트는 외로움의 문제를 무려 ‘비非전체주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전체주의 지도자를 맞이할 자세를 갖추게 되는’ 계기로 풀이한 바 있다. 하지만 아렌트는 ‘혼자 있음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을 섬세하게 구별한다. 혼자 있음 자체는 딱히 문제가 아니다. 혼자 있으면서 잠깐씩 외로울 수는 있다. 문제는 외로움이 ‘매일매일의 경험’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대중사회,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