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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미 Jan 10. 2024

活 (활)

다정하게 한 글자로

*한글 또는 한자(漢字)로 한 글자씩 한 글자씩.


‘活’은 ‘생활(生活)’ 할 때 말하게 되는, 우리말로 한 음절짜리 한자어다. 생에 활이 붙어 생활이 된 것. 우리 말로 ‘삶’이라고 하면 될까? 글쎄, 꼭 들어맞는 것 같지 않다. ‘살아있다’나 ‘살아간다’가 조금 더 어울리는 듯.


가만 보면 ‘태어난다(生)’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 같다. 그러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신체에 산소를 공급하는 호흡, 음식 섭취와 소화와 배설, 운동 및 이동, 듣기와 말하기와 생각하기, 인간관계에서의 관심과 공감 주고받기 등….


살아간다는 것은 단 한 가지의 정의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정의롭지 않다는 게 아니라,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언어유희, 흔히들 ‘아재 개그’라고 하던가.


헌데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언제나 정의롭다, 항상 올바르다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니기도 하다. 이렇게 써놓으니 꽤 ‘코헬렛’스럽다. 코헬렛은 전도서(구약성서)의 히브리어 이름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전도자, 대충 그런 뜻이 될 것 같다. 코헬렛의 처음 몇 마디를 읽어보자.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 만물이 다 지쳐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아마 그렇지 않을까. 말로는 다 나타낼 수 없는.




중국소설가 위화(余華)가 쓴 ≪활착(活着)≫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인생≫ 혹은 ≪살아간다는 것은≫으로 번역되곤 한다. 이 작품은 영화 <인생>으로도 제작되었다.


사진출처: 바이두

주인공 푸구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는 대체로 상황과 환경에 ‘휩쓸리듯’ 살아간다. 국공내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까지 사회의 상황이 급격히 소용돌이치는데, 푸구이의 인생사, 가족사도 덩달아 소용돌이친다. 푸구이는 '하필이면 그때' 태어나 살아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신이나 나나 우리 모두 '하필이면 이때' 태어나 살아가듯이.


그러나 푸구이는, 꼭 그렇게만, 휩쓸리듯 운명론적으로만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당대 중국에서 꼭 그렇게 푸구이처럼 살아간 사람은 아마 푸구이밖에 없을 것이다.


사진출처: 바이두


푸구이는 밭에서 일하는 소의 이름을 매번 다르게 부른다. 혼자만 일하는 게 아니라는 착각을 소에게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설명하는데, 사실상 그는 소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리운 사람(가족)의 이름을 하나하나 차례차례 불러보는 듯하다. ‘살아간다는 것’을 한때 수행했던 사람들, ‘살아간다는 것’을 지금은 종료한 사람들, 그들이 자기 마음속에 살아있다는 것, 그들이 자기 마음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문득 확인하는 일.


그래서 다정한 한 음절 한 글자. 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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