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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래 Mar 11. 2020

ENFP이고 싶었던 ISTJ의 고백

인지부조화를 인정하는 과정



전 국민이 강제로 '집순이·집돌이'가 된 요즘, 여러 종류의 심리테스트가 연일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다. 자신의 공부 유형을 파악해 어울리는 스터디 메이트를 알려주는 테스트부터 원하는 이상형의 모습을 비슷한 동물로 설명해주는 테스트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대학교 학과 테스트'가 모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어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자신의 성격과 어울리는 학과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테스트다. (나는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지만, 대체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서인지 체육학과가 나왔다.)


재미 삼아 해보는 일이란 걸 알고 있지만, 어쩐지 문제의 답을 고를 때만큼은 신중하다. 어떤 답을 고르느냐에 따라 나와 어울리는 꽃이, 동물이, 그리고 학과가 순식간에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떨리고 진지해지는 이 마음엔 평소에 좋아하던 꽃이나 귀엽다고 생각했던 동물이 나와주길 바라는 약간의 기대 심리가 깔려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의 모습과, 남이 판단해주는 나의 모습이 일치하길 바라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원하는 결과가 턱턱 나오는 것은 아니다. 대학교 학과 테스트에서 신문방송학과가 매칭되어 '나는 뼛속까지 신방과인가 봐'하며 친구들에게 으스대고 싶었지만 난데없이 체육학과가 나왔듯이. (물론 이 테스트는 유독 신빙성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절대로 체육학과가 나와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나의 외향적이고 활기찬 이미지를 타인 또한 인정해주길 바랐지만, '당신은 내향적이고 수줍은 사람이군요'라며 반박할 생각 말라는 듯 못 박아버리듯이.


이런 말로 형용하기 애매한 감정을 우리는 흔히 '인지부조화'라고 부른다. 인지부조화는 개인이 갖고 있던 태도나 행동, 믿음이 모순될 때 받는 스트레스나 불편한 감정을 말한다. 인간은 평소에 자신이 굳게 믿고 있던 생각이 새로운 정보로 인해 상충할 때, 불일치한 상황을 최대한 일치하도록 만들어 불쾌한 감정을 줄인다. '네가 틀렸고 내가 옳다'고 믿는 마음 한구석의 고집이 억지로 상황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뭐 그냥 재미로 하는 거지, 하면서.


하지만 이런 심심풀이용 테스트가 아닌 심리상담센터에서도 이용하는 전문 성격유형검사를 하게 되면 말이 달라진다. '재미로 하는 거지', '유사 과학일 뿐이야'라며 웃고 넘기기엔 기업과 대학, 정부 차원에서도 적극 활용하고 있단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이상한 결과가 나오거나 썩 맘에 들지 않는 분석을 당하면 여간 찝찝한 게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MBTI(Meyers Briggs Type Indicator) 검사다. MBTI 검사는 외향-내향(Extroversion-Introversion), 감각-직관(Sensing-Intuition), 사고-감정(Thinking-Feeling), 판단-인식(Judging-Perceiving) 등 4가지 지표를 통해 개인의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청렴결백한 논리주의자, 만능 재주꾼, 선의의 옹호자, 용의주도한 전략가 등 유형에 따른 명칭도 다양하다. 테스트를 하기 전, 생김새가 제각기 다양한 16가지 캐릭터와 이름들을 쭉 훑어보면서 내심 나와줬으면 싶은 캐릭터를 좀 더 오래 눈여겨본다. 그렇다, 이것은 가급적 인지부조화를 마주 하고 싶지 않은 나의 버릇이다.


사실 고등학교 때 이 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나는 'ENFP' 유형이 나왔다. 외향적이고 감각적이며 이성보다는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 다른 말로 '스파크형'이라고도 한다. 배낭을 메고 당당한 자세로 손을 들고 있는 캐릭터 밑에는 전 세계에 1%밖에 없는 유형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 결과가 몹시 맘에 들었다. 언제라도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톡톡 튀어나올 것 같은 '스파크'라는 별칭도, 왠지 특별하게 느껴지는 '전 세계 1%'라는 말도.


몇 년이 지나 MBTI가 다시 유행이 될 때쯤 오랜만에 재검사를 해봤다. 그랬더니 웬걸! 'ISTJ'라는 알파벳과 함께 한 손엔 서류를, 다른 손엔 펜을 들고 있는 다소 고지식해 보이는 캐릭터가 떡하니 나타났다. '재기발랄한 활동가'가 서 있던 자리에는 '청렴결백한 논리주의자'만이 남아있었다. 몇 년 전 그때와는 180도 다른 결과였다.


하지만 이보다도 더욱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ISTJ 유형이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성격 유형이라는 담백한 설명이었다. 어째서 '전 세계의 1%'였던 내가 가장 흔하디흔한 성격으로 전락해버린 것인가. 그 말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이고 되뇌어 읽고 나서야, 특출나 보이고 싶었던 마음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자라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나? 내가 그렇게 내성적인가? (내성적인 성격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외향적이고 톡톡 튀고 '싶어 하는' 사람이므로) 별의별 생각을 다하던 중 문득 몇 가지의 문항들이 떠올랐다. 왠지 나를 불편하고 찜찜하게 만들었던 몇 가지의 질문들. 쉽게 답안을 체크하지 못하고 3초 이상 멈춰서 고민하게 만들었던 질문들.


Q.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정당화시켜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Q. 종종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Q. 불안하다고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거침없이 답을 누르던 손가락이 이 세 개의 문항 앞에서는 고장 난 듯 머뭇거렸다. 나에게 인지부조화는 이런 식으로 찾아온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고 싶지 않지만 솔직해야만 할 때. 마침내 이해가 되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거침은 없고 확신은 있으며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내가 어째서 내향적이고 예민하고 불안정한 '소심이'가 된 것인지.


그것은 고등학교 때의 내가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시 나는 현재의 내 모습이 아닌 내가 바라는 내 모습을 떠올리며 답을 선택했다. 너는 너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고, 타인을 부러워하지 않고, 쿨한 사람이야. 맞아, 난 그런 사람이야. 난 꽤 괜찮은 사람이야. '어딘가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냐'는 마음의 소리는 외면하면 그만이었다. 어떻게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고등학교 때 받은 성격의 성적표가 사실 거짓이었다는 점을 비추어 볼 때, 두 번째 검사 결과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저 세 문항에 대한 답이 결과를 달라지게 한 주된 원인이 아닐 수도 있고, 정말 자라면서 성격이 변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게 진짜 나이고, 스스로에게 솔직했던 나이니까. 캐릭터의 생김새가 썩 만족스럽진 못해도, 내가 원하는 이상향과는 전혀 딴판이더라도, 그리하여 분석된 내 성격이 마음에 들진 않더라도 그런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마음에 드니까.


나는 가끔 나 자신을 정당화시켜야 할 것만 같고,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며(또 때로는 격렬하게 질투하며), 자주 불안해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활자로 한 자 한 자 적으니, 그동안 부정해오던 내 성격에 마침내 백기를 든 기분이다. 그래, 난 이런 사람이다. 그래도 인정하고 나니 생각보단 나쁘지 않네. 아니, 오히려 더 근사한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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