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이 남지 않는 걸음에 대하여

첫 번째 키워드 <발자국>

by 안진진


발자국은 자연스럽게 남겨지는 것이라고만 생각해왔다. 내가 앞으로 나아갈 때 한 뼘 정도 뒤에 졸졸 따라오는 것.


특히 겨울은 나의 발 사이즈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 좋은 계절이다. 눈이 도톰하게 쌓일 정도로 많이 오는 날에는 일부러라도 밖을 나가서 도화지처럼 펼쳐진 집앞 공터에 발도장을 쿵쿵 남겨보곤 했다. 내가 첫 번째로 이 눈 위를 걸었다, 이 땅을 밟았다. 선착순으로 경품을 받는 행사에 1등으로 도착했을 때와 같은 작은 쟁취감을 느끼면서.


한편 지저분한 발자국에 의지를 하던 날도 있었다. 이를테면 함박눈이 내리던 밤, 어디부터가 도로이고, 어디까지가 얼음일지 알 수 없는 내리막길을 마주했을 때.


난처하기 그지 없는 순간에 염화칼슘에 녹아버린 눈과 구정물로 어지럽혀진 길을 발견하면 티 없이 깨끗한 눈길보다도 반가운 마음이 들곤 했다. 길의 부분 부분에는 진회색빛 발자국이 축축하게 남아있는데, 그 모습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모르는 누군가가 조심조심 걸어 내려가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희미한 발자국 위에 나의 발자국을 겹치면, 앞에 나아가는 이가 없어도 함께 걷는 듯한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발자국이란 그런 것인 줄로만 알았다. 남길 수 있어 흡족하고 따라갈 수 있음에 든든한 것. 이곳에 존재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발자국을 지워가며 걸어야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알기 전까지는.





동굴로 가다가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아버지가 조릿대를 꺾었어요.

나한테는 앞장서 가라고 하고, 아버지는 바닷게 처럼 옆걸음을 걸어서 나를 따라왔어요.

두 사람의 발자국을 조릿대 잎으로 쓸어 지우면서.


이디서 어디로 가, 아빠?


내가 멈춰서 물을 때마다 아버지는 차분한 목소리로 방향을 알려줬어요.

더이상 길이 없는 산속으로 접어들면 나에게 등을 내밀어 업히라 하고,

그때부턴 당신의 발자국만 쓸어내며 비탈을 올랐어요.

업힌채로 나는 발자국들이 사라지는 걸 똑똑히 지켜봤어요.

마술 같았어요.



매 순간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사람들처럼.

우린 단 한 점의 발자국도 남기지 않으며 걷고 있었어요.



<한강 / 작별하지 않는다>




이 구절을 읽은 후부터 나에게 발자국은 제주 4.3사건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는 발자국. 1948년에 찍혔으나 50년 가까이 눈 아래 깊숙이 묻혀있던 발자국. 파헤치고 찾아야 하는 발자국.



흔적이 남아서는 안 되는 삶에 대해 그려본다. 그럴 때면 왠지 두 발로 덮인 눈을 푹푹 밟고 마구 비벼 가려져 있던 시커먼 아스팔트를 드러내고 싶어진다. 세상이 눈으로 덮일 때마다 누군가 여기 있었음을 알리던 나의 장난스런 발짓과 내리막길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길라잡이를 해주던 흙발자국. 그 단순한 장면이 왜 상징처럼 나의 마음에 남았는지. 겹쳐진 발자국이 꼭 삶의 복선 같다고 괜한 의미를 부여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겠다. 조용한 다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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