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키워드 <코트>
지금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 깨달은 것은 집으로 향하는 시내버스에서 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뺀 순간이었다.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과 같은 한겨울이었다. 대중교통에서 내릴 때 주머니에 넣어둔 장갑을 끼는 습관이 있는 나는 그때도 같은 행동을 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부드럽게 느껴지는 장갑을 꺼내어 손에 끼워넣으려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장갑에 처음 보는 꽃무늬가 붙어있었다.
처음엔 장갑이 바뀐줄 알았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게 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추운 날씨 탓에 사고도 얼어붙었던 게 분명하다. 내 것이 아닌 장갑을 어정쩡하게 들고, 대체 어떻게 하면 장갑이 바뀔 수 있는지 깊은 상념에 잠긴 채 집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유난히 옷이 낀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녁을 너무 많이 먹었나 생각이 머무르는 것도 잠시, 곧 등골이 싸해졌다.
그대로 고개를 숙여 어둠 속에서 입고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한밤중 가로등이 없는 길이어서 시야가 침침했지만 유난히 짧은 소매, 무릎을 넘지 않는 엉성한 기장이 눈에 조금씩 들어왔다. 집으로 들어선 순간, 엄마의 시선이 위아래로 왕복한 다음 대체 뭘 입고 있는 거냐는 물음이 들려왔을 때는 꿈이길 바랐다. 그제야 입고 있는 코트가 버건디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겐 버건디 아우터가 없다. 인생 처음으로 코트가 바뀐 날이었다.
무언가를 분실한 사람들이 으레 하는 것. 테이프를 되감기 하듯이 오늘 하루를 버스에서부터 역순으로 거슬러가본다. 시내 버스를 탄다. 친구와 네컷 사진을 찍는다. (관전 포인트: 네컷 사진을 찍을 때도, 그 앞에서 거울샷을 찍을 때도 알아채지 못함) 옷걸이에 걸린 옷을 입는다. 손님으로 가득한 바에 앉아있는다. 여기서 멈춤. 사건의 실마리를 발견한 탐정처럼 좀 더 심각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한다.
을지로 3가의 H카페는 낮에는 카페, 저녁에는 바를 겸하는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낮에도 밤에도 어둑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얼마나, 라고 묻는다면 그 날도 메뉴판을 읽다가 도저히 글자를 알아보는 것이 불가능해 휴대폰 조명을 킨 채로 친구와 농담을 주고 받았을 정도였다. 공간 한 쪽에는 아우터 몇 벌을 걸 수 있는 행거가 있었다. 우리가 바에 들어갔을 때는 마침 그 옆 2인 테이블이 비어 있었고, 덕분에 코트를 벗어둔 다음 자리에 앉는 게 스무스한 동작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방을 챙겨 들고 코트를 입는 것이 몇 걸음으로 가뿐히 해결되었다. 무언가 연상될 거리가 없을 만큼의 찰나이다 보니 남은 기억은 이것이 전부다. 더 쥐어짜내라고 한다면 행거에서 코트를 벗길 때 여벌의 코트가 2~3벌 정도 걸려있었다는 정도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그 바는 플래시를 킬 정도로 어두웠다. 블랙, 브라운, 버건디가 모두 같은 색으로 보였다.
이후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카페 인스타그램 계정에 DM으로 CCTV 확인을 요청하기, 연락처 남기기, 코트 주인에게 전화가 오면 회신해줄 것을 부탁하기, 그리고 기다리기가 전부였다. 아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한탄하기. 돌아오는 대부분의 반응은 '그걸 어떻게 착각할 수가 있어?' 였지만.
그로부터 나는 약간의 기대와 약간의 걱정을 동시에 껴안은 채로 며칠을 보냈다. 기다리면 으레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이X끼 먹튀하는 거 아니야, 하는 불안감. 그런 반인류애적 감정이 솟구칠 때면 코트 주인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키웠다. 그 사람도 얼마나 놀랐겠어. 나랑 똑같은 상황인데. 물론 내 코트가 더 비싼 거긴 하지만...이라는 생각은 올라올 때마다 억지로 계속 삼켰다.
복병은 카페 사장님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비협조적이었고 일단은 자신의 사업장에서 코트가 분실(혹은 교환?)된 것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런 일은 저희도 처음이라서요' 라는 말만 반복할 뿐 특별한 대책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것은 분명히 '네가 잘 챙겼어야지'의 뉘앙스였다.
사장님에게 몇 번을 간곡하게 부탁하고서야 인스타그램 DM으로 어두침침한 가게 내부 CCTV 화면 한 장을 받아볼 수 있었다. [저희 가게가 어두워서 잘 안 보이네요ㅠ] 짧은 답장과 함께. 플래시를 킬 수 없으므로 가능한 최대치로 확대를 해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실루엣 뿐, 마땅히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코트 주인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연민과 신뢰, 인류애를 모두 넣어두고 성악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부정적인 기운을 뿜어내며 찾기는 글렀다고 틈만 나면 푸념했다. 그럴 때마다 남자친구는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연락이 올 거라고 자신하며(무슨 자신감으로?) 나를 다독였다. 남자친구는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다. 인류애가 충만하며 인간의 선함을 믿는다. 마음을 쓰고 베풀면 언젠가 반드시 스스로에게 돌아올 거라는 신념으로 살아간다. 혹은,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 사라진 물건은 응당 찾아야 하는 법.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 CCTV를 확인한 후에도 매일 카페에 전화해서 코트의 행방을 물었다. 그때마다 난처한 표정이 그려지는 앳된 여자 알바생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사장님과 달리 성실하고 친절한 알바생은 며칠 뒤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어떤 분께서 조금 전에 코트 관련해서 연락을 주셨는데요, 지금은 일이 있어서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 주신대요.
회사 폰부스에서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채로 ‘코트’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맞는지 거듭 확인했다. 이어 전화가 왔던 연락처를 받아볼 수 있는지 물었다. 남자친구가 맞았고 내가 틀렸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무게추가 성선설로 기울어지려는 순간 이 전화기는 발신자 연락처가 표시되지 않는 전화기라며, 그 분에게 다시 연락을 받으면 전화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가게로부터 더 이상의 연락은 없었다.
그녀에게 모종의 사연이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3년 전 사라진 코트 이야기는 내가 성악설을 믿는 데 힘을 실어주는 일화가 되었다. 당시에도 돌려 받지 못할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실망했나. 불신의 마음 한 켠에 '그래도'가 있었나. 인간은 태생이 악하다고 주장하고 다니면서도 내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길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선과 악을 시소처럼 오르 내리는 나를 본다. 조금이라도 빨리 일이 끝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에스테틱 전단지를 한움큼씩 받은 채, 지하철에서 몸을 부딪쳐오는 사람에게 눈을 부라리며 표정으로 욕을 뱉는 사람. 그런 나를 돌아보면 내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진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선택지가 있을 때 조금 더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을 뿐.
1년이 넘도록 보관해두었던 먼지 쌓인 코트를 버리며 생각한다. 난 그녀에게 진심으로 코트를 돌려주고 싶었다. 물론 되돌려 받고도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