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 마흔 정거장을 버티는 법

세 번째 키워드 <귀가>

by 안진진

이직을 하고 싶은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딱 세 글자로 말하라고 한다면 '귀갓길'이다. 다른 말로 출근길 혹은 퇴근길. 나는 편도 80분, 왕복 3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을 매일 길거리에서 보내고 있다. 이것도 햇수로 5년째가 접어드니 이제는 어떠한 경지에 이른 것 같기는 하나, 그래도 가끔씩은 참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호르몬의 방해를 받는 기간에는 더더욱 그렇다.


몇 년 간 짓눌리고 밀리고 치이고 땀 나는 출퇴근길을 반복하며 깨달은 것은 이 시간을 견디려면, 반드시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하게 들어선 인간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잊게 해줄 수 있는 무언가, 이를테면 도파민 충족용 콘텐츠 같은 것.


한때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도 단단하게 중심을 잡고 서서 도인처럼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이들을 보며 비슷하게 흉내를 내보려고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종이책은 집에서부터 챙기는 걸 깜박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영어 공부 비슷한 걸 하자니 한 정거장에서 다음 정거장까지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져 성격이 실시간으로 좋아지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보다 확실히 수행이 덜 된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결국에 나의 선택은 돌고 돌아 전두엽을 짜릿하게 자극할 콘텐츠. 이것이 장기적으로 나의 인지 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다. 커피가 몸에 좋지 않은 걸 알면서도 당장의 졸음을 해소하기 위해 매일 라떼를 들이붓는 것처럼(사실 지금도 마시고 있다) 내 손은 이미 넷플릭스 혹은 티빙에 접속하고 있다.


요새 나의 몰입용 콘텐츠는 아래와 같다.


· 나는 솔로(&나솔 사계) : 오랜 나의 밥친구, 출퇴근 친구. 이 방송이 사라지면 내 출퇴근 세상은 무너진다. 매주 수요일에 방송하기 때문에 목요일은 출퇴근길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가볍다. 내가 생각하기로 한국인은 두 부류의 인간으로 나뉜다. 나솔을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


· 셀링 선셋 : 벌써 시즌9까지 나온 장수 프로그램. 넷플계의 나솔이다. 한때는 흥미진진하게 시청했으나, 반복되는 포맷(집 소개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중개인들끼리 싸움→화해함→또 싸움)에 지겨워 잠깐 멀리했었다. 최근 영어 공부를 핑계 삼아 다시 시즌8부터 정주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그녀들은 영원히 싸우기만 한다.


· 운명전쟁49 : '무속'과 '서바이벌'의 조합이라니. 중학교 때부터 슈퍼스타K, 마스터셰프코리아, 도전! 슈퍼모델 등 각종 분야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고 자란 서바이벌 키즈로써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새해를 맞이해 사주를 보러갈까 고민하던 찰나에 방영이 시작돼, K샤머니즘에 대한 맹신을 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들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저녁으로 번갈아 보다 보면 2호선 16정거장, 4호선 4정거장 도합 20정거장의 여정이 끝난다. 매일 왕복 40정거장, 일주일에 200개의 정거장을 오가는 동안 하는 일이 고작 연애 프로그램과 외국 리얼리티 쇼, 서바이벌 프로그램 보기...라고 하니 다소 시간을 길에 버리는 듯한 기분이 없지 않아 있으나 이 콘텐츠들이 없었다면 나의 퇴사는 진작 당겨졌을 것이다. 그 외에 환승연애를 비롯 넷플과 티빙 각종 오리지널 콘텐츠들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얼마 전 운동 중에 스쿼트 홀드 자세를 한 적이 있다. 30초 가량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온 몸으로 퍼지는 고통스러운 감각에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그대로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운동 중이란 사실을 머리에서 지워내고, 여기 '서 있는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여기며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아직 답장하지 못한 친구의 카톡, 조만간 사야 되는 화장품 같은 것들. 발목이 부들부들 떨리고 막판에는 자세가 엉망이 되었지만 정신을 다른 세계로 보낸 덕분에 끝까지 버틸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해가 바뀌는 이맘 때 올해는 출퇴근길에 영자 뉴스레터를 읽는다거나 팟캐스트를 듣겠다거나, 이런저런 다짐을 했을테지만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다. 스쿼트 홀드를 하면서까지 공부를 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모로 가도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가장 현명한 방법은 면허를 따고 차를 사서 자차로 출퇴근을 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오늘은 나솔을 보면서 귀가할 수 있는 목요일이니까 괜찮다.




(2월 5일에 작성된 글이어서 내용에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볼거리가 떨어져버린 적적한 화요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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