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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수샘의 장이불재 Jun 04. 2024

'그래도 꿈을 꾸고 싶은' 비문학 수업 노래

  4년 전에 고3 수업할 때도 EBS 수능 특강을 풀었지만, 올해는 노안이 심해져서인지 교재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서 당황하는 경우가 꽤 있다. 나름대로 수업 준비를 한다고 깨알처럼 메모해 놓은 내 글씨가 보이지 않아서, 수업을 하다 교재에 코를 박을 때도 있다.



  이럴 때면 "선생님이 여러분 아빠 뻘이라 이해 좀 해줘요. 열심히 교재 연구를 해서 눈이 더 나빠지는 것 같아요." 하고 아이들에게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특히 어려운 과학·기술 지문의 이론적 내용을 목청 높여 설명하다 보면 '모태 문과인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라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간략하게 문제 풀이만 하고 넘어갈 수는 없어서 힘들다.


  그래도 착한 아이들이 다가와 격려(?)해 줘서 다시 힘을 내기도 한다. 암세포의 증식에 관한 지문을 가르치고 나서 교실을 나서는데, 한 학생이 웃으면서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인터넷에 고3 국어쌤들이 물리나 생명 과학을 필기하며 비문학 수업하는 짤이 도는데, 선생님의 모습과 비슷했어요.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지난주에 드디어 비문학 진도를 다 나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문학 지문으로 직진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배움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간단하게 수업 설문을 받았다.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비문학 지문 1개를 선택해서, 그 이유를 적어서 제출하는 설문이다.





  예상한 대로 미술을 하는 학생은 '마네의 예술 세계'에 관한 지문을 골랐다. 수능을 볼지 안 볼지는 모르겠지만, 수업 시간에 접했던 마네의 이야기가 그 학생에게 작은 영감이라도 주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로가 확실한 다른 학생들도 저마다 관련된 지문을 선택해서 배우고 느낀 점을 적었다.



  그렇다면 '영상편집'이나 '제과제빵'이 진로인 학생에게 비문학 지문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학생들이 적은 글을 읽어보니 나의 자괴감이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비문학 지문은 잘못이 없다. 글을 있는 그대로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저마다 다양한 방법을 표현하면서 생각을 넓고 깊게 만드는 활동을 못 하게 만드는 수능 중심의 교육 환경이 문제인 것이다.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소통과 공감이 있다면 그래도 할 만한 국어영역 비문학 수업을 꿈꾸며 다시 힘을 내고 싶다. 영상편집을 철학과 관련지어 생각한 학생, 그리고 제빵사의 꿈을 담보물권 중의 하나인 유치권과 멋지게 연결한 학생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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