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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서 너희들을 기다릴게

- 신영복의 <강의>에서 '노자' 읽기

by 글쓰는 민수샘


거실 책꽂이에서 버릴 책들을 고르다가 <강의>를 손에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10년 넘게 정독을 한 적이 거의 없었기에 이제 놓아주는 게 순리였지만, 신영복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 망설였다.


그러다 무심코 '노자의 도와 자연'을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소파에 앉아 한참을 읽었다. 형광펜을 가지고 와 밑줄도 치게 되었다. 신영복 선생님의 사상과 경험에서 나온 생생한 주석들이 찰떡처럼 내 안에 달라붙었다.


내가 나이를 더 먹은 것도 있겠고, 최근에 주식을 시작하면서 하찮은 물욕에 눈이 어두워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강의>는 재활용장에서 건진 '진정한 내 책'이 되었고, 선생님의 동양고전 독법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노자의 말씀은 공명이 컸다. 남은 교사 생활도, 소소한 주식 투자(?)도 이렇게 실천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어서인지 '신뢰'에 관한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대학 교수로서 학생들을 만났던 선생님의 지혜가 눈부셨다.


대학교 1, 2학년은 고3 터널을 빠져나온 직후의 짧은 반동기(反動期)이기도 하지만 그 세대는 대중문화와 상품 미학에 상당히 깊이 포섭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3, 4학년이 되면 분명히 달라져 있습니다. 나는 해마다 신입생 몇 사람을 정해서 그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분명히 변화합니다. 변화하는 이유는 “생활이 그대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삶의 골목에서 이러저러한 충돌을 통해서 현실의 벽을 몸으로 터득해 가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집단적으로 터득해 갑니다. 그래서 나는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강의도 하나의 골목이기를 바라지요. 여러분이 걸어가는 여러 골목 중의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언젠가 여러분이 자신의 사상을 정돈하는 작은 계기로서 추체험(追體驗)되기 바라는 것이지요.


아이들에게 큰길로만 가라 하고, 골목은 피하라고 하는 어른들이 많은 현실에서 진정한 스승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빠르고 안전한 길로 모든 아이가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나태함이, 망설임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좌절하게 하는지…


신영복 선생님의 온기가 남아있는 흔적을 따라 걸으며, 어느 골목이든 내가 먼저 들어가 아이들을 기다려야겠다는 불온한 생각을 해 본다. 자기 힘으로 만든 진짜 생활 속에서 진정한 배움을 얻을 수 있도록, 아이들을 믿고 기다리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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