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중순, 학교의 지필고사 기간이라 책 몇 권을 읽었습니다. 저와 인연이 깊은 엄기호 교수님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읽으면서, 직업 탓인지 학교에서 만는 아이들의 고통을 생각했습니다.
"처음 고통을 겪으면 그 고통으로부터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다. 무엇을 배우려고 한다. 신의 의도든 삶의 의미든 혹은 고통을 다루는 역량이든 뭔가 고통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되려고 한다. …
끝날 줄 알았던 고통이 반복되면 고통을 겪는 일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해진다. 의미는 끝이 있고 다시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아무리 생각하고 노력해도 끝이 없다고 절망하는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봤자 답이 없기 때문이다. … 따라서 오로지 바라는 것은 생각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고 싶다. 잠이 올 때가 제일 행복하고 잠에서 깨어날 때가 가장 괴롭다. 또 이 지긋지긋한 끝없는 것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저는 시험 기간 동안 복도감독관을 했습니다. 교실을 돌며 출석현황표를 수거하고, 질문이 있으면 고사본부로 전달하고, 화장실을 가는 아이들을 통제하는 역할입니다. 올해 마지막 시험이라 숫자가 많이 줄었만, 시험 보는 교실로 슬슬 걸어오는 아이들과 시험을 치르는 50분을 못 견디고 화장실을 간다고, 물을 먹겠다고 나오는 아이들은 여전했습니다.
개학, 한 학기 두 번의 지필시험, 계속 이어지는 수행평가, 방학 후에 다시 시작되는 지필시험과 수행평가, 그리고 종업 속에서 어떤 아이들은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고 아무 것도 끝내지도 않습니다.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고 졸업을 합니다. 애초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오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조금이라도 자신과 친구, 이 세상에 대해 생각을 하고 조금이라도 배워서 사회가 나갔으면 좋으련만, 쉽지 않습니다. 이런 오래된 고민을 흔드는 이야기를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서 만났습니다. 엄기호 교수님은 고통을 나눌 수 있기 위해서 '언어의 집 짓기'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언어는 세계를 짓는 도구다.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듣고 그 말에 응답하면서 그 사람과 나 사이에 관계를 맺고 유지한다. 말을 통해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면서 그 안에 나와 그가 머무른다. 이것을 공동의 집, 세계라고 한다. 언어는 바로 이 공동의 집인 세계를 짓는 도구다. …
모든 말은 응답을 기대하며 응답하기에 말이 된다. 고통을 겪으며 자기에게 함몰된 이가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이 응답으로서의 말이다. 응답을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지만 웅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고통을 겪는 이의 가장 큰 절망이자 딜레마다. 그래서 그 말이 파국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복적으로 내뱉게 된다. "넌 내 고통을 모른다."
시험 기간에도 학교에 늦게 나타나는 아이들, 자신을 바라보는 선생님과 아이들의 표정 혹은 무관심, 시험을 보다 그냥 집에 가버려도 이유를 묻지 않는 주위 사람들 속에서, 어쩌면 아이들은 학교라는 공동의 세계에서 언어의 집을 짓지 못하고 유령처럼 떠도는 유랑객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교사는 아아들에게 응답을 요구하지만, 교사가 먼저 아이들의 고통에 제대로 응답했는지 되돌아 봅니다.
그리고 개인적, 혹은 사회적 이유로 학교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아이들의 곁을 지키는 교사가 무너지지 않도록, 즉 '고통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의 고통'에도 제대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학교의 역할이고, 교사 학습공동체의 존재 이유이고, 교장선생님과 선배 교사의 책임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이용하지 않는 것, 그 어려운 길 속에서 인간이 비로서 인간다워짐을 어렴풋이 짐작해봅니다.
"고통을 겪는 이를 지원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이다. 고통의 곁에 선 이가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버틸 수 없을 때 안전하게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 물러남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않도록 고통을 겪는 이를 돌볼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곁에 선 이가 '독박'을 쓰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의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게 사회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