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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괴왕 Apr 01. 2020

코로나 탓을 할 수 없는 삶에 대하여

요즘 뭐 하고 지내?

백수에게 이것만큼 난처한 질문이 없다. 백수가 뭘 하고 지내겠어. 채용 공고나 뒤적거리고 쓸 곳이 생기면 열심히 지원서 쓰고. 그냥 그렇게 지내지 뭐. 평소라면 이렇게 말하겠지만 요즘 같은 때는 나도 뭔가 호들갑스러운 대답을 하고 싶다. "아유, 코로나 때문에 죽겠어. 채용도 안 뜨고 스터디도 못하고 말이야."

사실 채용이 안 뜨고 스터디를 못하는 건 나한테나 큰일이다. 남들이 보기엔 '그게 코로나 때문인가' 싶을 거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에도 채용은 잘 뜨지 않았고, 채용이 떠도 난 여러 번 그 기회를 놓쳐왔다. 스터디를 열심히 할 때도 면접에서 떨어지고 열심히 하지 않을 때도 떨어졌다. 추운 겨울이 가고 꽃잎이 피고 지는 동안에도 내 세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집 밖엘 나가지 않지만 사실 그 전에도 백수 생활 몇 년 동안 자존감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스터디를 할 때 말곤 잘 돌아다니지 않았다. 지난 12월과 이번 3월 동안 달라진 건 가벼워진 옷차림과 살짝 들뜬 기분뿐이다. '코로나 때문에 삶이 팍팍해졌다'라고 말하기엔 이 백수의 삶은 원래도 볼품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코로나 때문에'로 운을 띄우며 요즘을 한탄하기가 무안하다.


영화 <김씨 표류기>의 남자 '김 씨'가 생각난다. 그는 죽으려고 한강 물에 뛰어들었지만 무인도에서는 세상을 갈망했다. 무인도에서의 삶에 살짝 적응할 때쯤 강제로 무인도에서 끌려 나오게 된다. 섬에서 나온 뒤에도 여전히 그에게는 돈도 직업도 없고 여전히 죽고 싶다.

죽으려고 한강 물에 뛰어들었던 김 씨. 하지만 그도 무인도에 갇히자 구조 요청을 한다.


아마 나도 이럴 것이다. 가끔 기분 전환을 위해 했던 밤 산책, 혼자 찾던 영화관, 스터디 사람들과 고충을 나누던 수다시간, 가뭄에 콩 나듯 올라오던 채용 공고. 나도 코로나로 잃어버린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도 이런 것들이 없는 삶을 참아내고 있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코로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타나 기승을 부렸던 것처럼 또다시 제멋대로 사라져 버릴 거다. 내가 진짜로 무서운 건 여기서부터다. 코로나가 끝난다고 해서 내 사정이 나아질까. 없던 직업이 뚝딱 생길 리도 없고 평소 보지 않던 사람들이 보고 싶어질 리도 없다. 내가 코로나로 잃어버린 것들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것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다시 활기를 찾는 동안 나는 늘 볼품없던 삶을 그냥 확인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코로나 탓을 할 수 없는 삶을 누구에게 호소할 수 있을까. 세상의 관심사는 반토막이 난 대기업 주식에 있다. 원래 한 끼를 굶던 사람이 코로나로 두 끼를 굶는다던가 하는 문제는 지금 시점에 그렇게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결국 나는 이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내가 할 일은 코로나 종식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게 아니다. 돌아올 내 일상이 너무 보잘것없지 않도록 조금 더 나를 보듬고 조금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서러워도 그래야만 한다.



*이런 전개와 별개로 영화는 나름 해피엔딩이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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