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fraid. (난 두려워.)
성장영화가 가진 '성장'에 초점에 관하여.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든 생각과 마음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어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내는 습관이 있다. 순간에 스쳐간 감정을 잘 기록해야 영화가 오랫동안 남을뿐더러, 타인에게 이야기해줄 때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 늦게 영화를 보고 한참 동안이나 잠들지 못했다.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기에 내가 이 영화를 잘 적어낼 수 있을까 어렵게 느껴졌다. 손으로 적어내고 풀어내고 나서야 정리가 되었다. <몬스터 콜>은 오랜만에 본 성장영화였다. 나는 한 단계 클 수 있을까.
영화를 보기 전부터 영화에 관한 정보를 많이 들었다. 좋아하는 영화채널에서 소개되었고 아는 지인을 통해 괜찮다는 평을 들었다. 보겠다고 미뤄놓고 때 아닌 새벽에 갑자기 떠올라 봤다. 눈물을 펑펑 쏟을 정도의 슬픈 영화는 아니었다. 마음 한편이 시큰하게 아려서 조금 아프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코끝이 시려서 일시정지와 재생을 반복했다. 소년의 절규에서 눈물이 터지지만, 소리 내서 울지는 않았다. 많은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머니의 죽음을 앞둔 방황하는 소년 앞에 괴물이 나타난다. 괴물은 이야기를 전하러 왔고 마지막의 소년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다. 아이는 이후에 헤매고 상처받고 무너진다. 간략한 내용이지만 파고들자면 조금 더 복잡해진다. 영화 내내 소년은 괴물과 함께 성장한다. 이 괴물은 소년의 내면을 상징하기도 하고, 본성, 모태 어느 것이라도 이어질 수 있게 된다. 괴물은 소년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해준다. 선과 악, 믿음, 분노 이 모든 것들과 함께 전한다. 그에 따라 소년은 애매한 중립의 선에 서기도, 쥐고 있는 것들에 대해 믿고, 분노를 한 단계 발판으로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이 괴물의 이야기와 소년의 상황에 좀 더 집중해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와 메시지 그것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영화의 원작은 페트릭 네스의 <몬스터 콜스>. 사실, 책을 읽어보진 못했다.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지만 찾아서는 읽으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습관이 든 건 이전 경험의 바탕인데, 책을 보고 영화를 보거나, 영화를 보고 책을 보고 할 때마다 느껴지는 감동의 요소가 큰 차이가 있다. 글을 읽어가며 머릿속에서 만드는 나의 이미지는 영화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상대적으로 글이 방대해서 영화에서 모두 담을 수 없다. 예전에 <미 비포 유>를 책으로 읽은 뒤에 영화로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영화에서는 너무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서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나쁘지는 않았지만 이런 경험이 많다 보니 영화에서 받은 감동이 크면 책을 포기하거나, 책에서 받은 감동이 크면 영화를 포기한다.
소년은 아픔과 치유를 통해 성장한다. 어린 시절에 아픔이나 추억들을 소모성으로 사용하여 한 단계 올라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성장영화의 클리셰다. 주인공은 늘 해맑은 소년이거나 철없는 소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화해뿐이다. 하나, <몬스터 콜>에서의 소년은 전형적인 클리셰를 벗어난다. 타인에 대한 폭력과 절망, 불행에 요소의 진실을 마주함으로써 소년은 성장한다. 소년은 부정하고 싶은 진실을 뱉고 지쳐 쓰러진다. 소년을 향해 누구도 비난하지 않고, 관객조차도 소년에게 몰입되어 감정을 모두 소모하게 된다.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는 소년의 마음처럼 관객도 영화 속에서 함께 쓰러진다.
아픈 대사들이 많았다. 극 중 이혼한 뒤 새로 살게 된 아버지가 덤덤하게 '삶이란 게 그래, 날로 엉망진창이 되지, 하지만 괜찮아'라고 이야기하거나 '사랑은 약해, 많이 부족해' 같은 대사들은 많이 읊는다. 소년이 이해하기엔 어려운 대사 같다가도 뼈아프게 공감된다. 어머니는 때론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걸 싫어해'라는 굵직한 대사를 던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리암 니슨의 잔잔한 목소리로 들리는 괴물의 대사들이다. 소년에게 이야기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할 때 가만히 그 대사를 듣고 있노라면 성장에 포인트가 되는 키워드가 여기 있구나 하게 된다. 영화 후반 진실을 털어놓은 소년 앞에 괴물은 '두려운 게 당연하지. 힘들 거야. 그 이상이겠지. 하지만 넌 이겨나갈 거야'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영화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이 대사 하나를 듣기 위해 이 영화를 봤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중요한 장면에 매치되었다.
우리는 간혹 문제에 대해서 너무 괜찮아지려고 한다. 당황하게 되면 반사작용으로 '괜찮다' 고 스스로를 위해 정립하려 든다. 슬퍼할 수 있으며, 분노할 수 있음에도 타인의 시선이나 내적인 정립을 위해 스스로에게 거짓말하곤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괜찮지 못하다. '괜찮다' 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단순히 그 상황을 피하려고 했을 뿐 상황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결국 악순환의 고리는 이어지고 이어져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이제 필요한 건 '괜찮다'라는 말이 아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오직 당신만을 위한 진심 하나다.
영화를 소개하는 말 중에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말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단어 자체를 크게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이 영화를 꼭 어른들을 겨냥해 보라고 적어놓은 문구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어린 시절에 이 영화를 좀 더 일찍 마주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열심히 추천하는 중인데 단순히 '이 영화를 보세요' 가 아니라 '이 영화를 네가 봤으면 좋겠어'라는 멘트로 추천 중이다. 무분별하게 아무에게나 추천하고 싶지 않은 그런 영화이다 보니 좀 더 진심을 담아서 잘 추천하고 싶다.
우리는 아직 이별과 상실에 대해서 깊게 배워본 적이 없다. 내 세계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갈 만큼은 크나큰 상실감이라는 건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이별과 상실에 대해 천천히 준비할 시간을 준다.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열심히 부정하고 무너뜨리고 부수고 엉망으로 만들어도 좋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후에 본인을 위해 진실을 마주하게 되면 평생 지 못할 것이고, 삶에 기생하여 불행하게 만들 거라고 이야기한다. 꽤나 괴로울 거라는 말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해 나가길 바란다. 조금 지나치게 아프게 느껴질 수 있는 이 성장영화가 당신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때아닌 새벽에 나의 성장통을 도운 그런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