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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May 24. 2020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우리 사이에 굳이 통성명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가장 완벽한 국내산 B급 영화


2008년에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꼬꼬마가 어떻게 이 영화를 알았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당시 용돈을 모아 샀던 미키마우스 mp3에 우연하게 저장된 노래 덕분이었다. 당시에는 불법 음원 유통이 워낙 흔한 때였고 웹페이지 어디에서든 쉽게 신곡 모음을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그중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의 리쌍과 에픽하이가 부른 '다찌마와 리' OST가 우연하게 내 mp3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나는 뭔가에 홀린 듯 노래를 반복해 들었고, 이내 영화까지 보게 되었다. 12년도 더 된 당시 상황이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생각보다 영화는 내 취향이 아니었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하품만 쩍쩍 해대다가 영화가 끝나버렸고, 그렇게 영화는 추억 속에서 잠들어갔다. 그리고 최근에 OTT 플랫폼 중 하나인 '왓챠 플레이'를 끊게 되었고 거기서 이 주옥같은 영화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추억 반 호기심 반으로 영화를 틀었고, 국내에서 볼 수 없었던 가장 화려한 B급 영화를 만나게 된 소감은 뭐랄까 ... 진짜 개쩐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이 영화 평론들을 살펴보면 유난히 마니아층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편인데 생각보다 영화의 대한 평론이 전반적으로 호 쪽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영화 평론계의 아이돌로 유명한 이동진 평론가도 '뻔뻔하고 유쾌한 아나크로니즘(새로운 시대의 낡은 사고)의 재미'라고 말하는 걸 보면 평론가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촌스럽고 유치하고 어딘가 민망스럽기까지 한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이 대체 무엇일까. 바로 B급으로서의 역할을 고급스럽게 소화해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예술성을 운운하며 어정쩡하게 영화를 만들 바에야 키치 한 감성으로 그려냈다는 것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B급 영화라는 꼬리표가 붙었지만, 연출이나 구도부터 캐스팅과 연기까지 모두 A급으로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더욱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만주 웨스턴과 무성영화의 매력, TV에서나 볼 법한 콩트와 병맛 요소들이 굉장히 잘 어우러져 있다.




영화가 놓치지 않은 가장 큰 키포인트는, 코미디 영화가 가진 본질인 '재미'이다.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영화가 가진 가장 큰 주요 관람 포인트는 영화 곳곳에 대놓고 드러난 재미 요소들이다. 한국 영화가 가지고 있던 코미디의 악습에서 벗어나 대놓고 웃기겠다고 작정한 코미디 요소들이 묘하게 관객들의 웃음 포인트를 자극한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세트 배경부터, 70년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거창하지만 민망한 대사들, 한국어가 들리는 듯한 중국어와 일본어, 곰플레이어 자막과 누가 봐도 한강인 장소를 두만강/흑룡강/압록강으로 둔갑시켜 3번이나 우려먹는 뻔뻔함, 나사 빠진 주인공과 미쳐버린 조연들까지 ... 인물부터 대사, 장소, 내러티브까지 뻔뻔하게 진지한 척하는 영화 요소들이 영화 속에서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친다. 12년이나 지난 지금에 봐도 한 번쯤 피식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어설프게 웃기려고 시도하지 않고 '재미있는 영화'임을 인식시킨다. 




또한, '저질 영화'로 낙인찍힐 법한 이 영화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퀄리티'에 있다. 카메라의 연출 구도부터 짱짱하게 채워진 액션씬, 어설프게 연출하지 않기 위해 설계한 미장센은 류승완 감독의 노련미를 대놓고 볼 수 있는 좋은 볼거리였다. 버라이어티 쇼처럼 만들고 싶었다던 류승완 감독의 말처럼 영화 속 볼거리가 풍부함과 동시에 영화 전개 전반적으로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며 전개된다는 것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좋다고 해서 영화 자체가 좋은 영화라고 평가받기 어렵듯이, A급 감독이 만들었다고 해서 영화의 평이 좋다고 보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작정하고 B급 영화를 만들자고 했으니 어지간한 노력이 아니었다면 이런 작품이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금 민망하지만 류승완 감독이 아니었다면 이처럼 잘 뽑아내긴 어려웠을 것이다. 키치 한 감성, 재미, 퀄리티를 한 번에 잡기 위한 센스가 '과연 류승완이구나' 하고 감탄하게 만들어주었다.




재미와 퀄리티만 잡았다고 해서 영화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결말까지 하나의 스토리가 완성되어야만, 그리고 해당 스토리가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져야만 영화라고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시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사건의 기승전결이 모두 설명이 되어야 하고, 앞에 풀어놓은 떡밥들이 자연스럽게 회수되어야 하며, 동시에 인물들 간의 인과관계도 잘 풀어내야만 한다.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의 이야기를 보자.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첩보작전이 시작된다. 주인공은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마침내 사건을 해결하던 찰나, 누군가에 의해 저지되고 조력자를 만나게 된다. 조력자를 통해 성장한 주인공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고 악인을 물리친다. 과정에서 배신자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악인이 승리하는 순간 주인공은 판도를 뒤집어 결국 승리한다. 흠잡을 것 없는 이 클리셰가 진부해 보이지만 대부분의 영화가 이와 같은 스토리를 따라가려고 한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스토리는 평범하나 이를 연출하는 동안 관객에게 적절한 밀당을 선사한다. 피가 말릴듯한 긴장감은 없지만 극 중 분위기를 유지함으로써 적절하게 지루함을 벗어난다. 때론 이런 분위기를 환기시킬 장치들을 사용하고 관객은 쉽게 몰입하기도 한다. 제임스 본드의 007 시리즈를 오마쥬 했지만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소재를 사용해 거리낌 없는 스토리를 완성해냈다.




그럼 스토리를 살리기 위해 사용한 도구 중 가장 눈에 띄는 도구는 무엇일까, 바로 '액션'에 있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무술감독인 정두홍 감독과 허명행 감독의 지도로 고퀄리티의 액션씬들이 연출되었다. 넓은 평원에 트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총격씬과 채찍, 총, 칼 등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만들어낸 액션씬은 영화를 전반적으로 짜릿하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되었다. 앞 전개가 워낙 허술하기 때문에 액션씬도 허접할 거라는 우려와는 다르게 꽤나 흥미진진하게 액션씬이 완성되어 있다. 특히, 긴장감 넘치는 순간 속애서도 참참참으로 빌런을 처치하는 다찌마와 리(임원희 분)! 코미디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극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적절한 밸런스 요소로 작용했다. 후반부 액션씬에 비중을 많이 몰아놓은 듯한데, 일대 다수의 박진감 넘치는 전투씬은 아마 '주성치'식 쿵후영화를 오마쥬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외팔이 검객이라는 설정과 주인공이 각성한다는 것은 홍콩식 액션 클리셰에서 따오지 않았나 싶다.




'이제야 내 마음이 재건축되어 마음 한 구석에 새로운 세입자를 받을 여유가 생겼건만', '갑자기 울리는 총성은 피할 수 없는 법!', '하지만, 조국을 배신한 넌 간통죄야!' ... 이 얼마나 주옥같은 명대사들의 향연인가. 어쩐지 소년만화에서 나올법한 대사들이 영화 전반적으로 쉴 틈 없이 쏟아진다. 영화가 재미있는 점 중 하나인 '후시녹음'의 퀄리티가 생각보다 상당히 높다. 영화의 장면들과 함께 배우들이 입을 맞추는 게 꽤 어려웠을 텐데 생각보다 잘 맞아떨어져서 후시녹음이라는 사실을 중반부에 가서야 깨달았다. 조금 과장된듯한, 레트로 한 감성을 주는 주옥같은 말들이 이래저래 튕겨 관객의 귀에 쏙쏙 박힌다. 주인공 '다찌마와 리' 임원희 배우를 비롯해 여러 배우들의 톤이 인상적이지만 그중 최고는 국경 살쾡이, 바로 류승범 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건들건들한 모습을 목소리로 이렇게까지 표현해낼 수 있다니 행간에 우스갯소리로 떠도는 진짜 양아치를 배우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니지 싶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서양 코미디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런 영화들이 반갑게만 느껴진다. 물론, 서양 영화가 가진 매력도 있고, 특유의 정서에서 나오는 웃음도 있겠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편이다. 편협한 시선 때문일 수도 있지만 지나치게 현실감이 떨어지는 탓에 국내 코미디에 대한 애착이 더욱 큰 편이다. 아쉽게도, 최근에는 이렇다 할 만한 코미디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최근에 본 코미디 영화는 필연적으로 메시지화 시키려고 하다 보니 웃고 떠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촬영기술과 관객의 수준은 상향되는데, 그에 따른 코미디 장르는 갈수록 위치를 잃어가는 기분이 든다. 개인적으로 최근 코미디 작품 중 최애를 꼽자면 이병헌 감독의 <극한직업>을 꼽고 싶은데, 코미디 그 자체에 충실한 영화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두 영화 모두, 관객이 작품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따지기 전에 본질에 집중했기 때문에 코미디 영화로서 가치를 잃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코미디 영화들이 더욱 많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99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의 러닝타임이지만 아쉽지 않게 재미있게 영화를 본 기분이 든다. 지루하지 않았고, 재미있었으며, 유치해서 부담 없이 볼 수 있었다. 킬링타임용 영화가 바로 이런 영화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배우들의 화려한 캐스팅이 한몫했기 때문에 이러한 배우들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 중반부에 건들건들 깡패로 나오는 리쌍의 모습은 '형이 왜 거기서 나와'를 자아내게 만든다. 아무 생각 없이 코미디 영화 한 편 보고 싶다면, 그리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는 신선한 영화를 보고 싶다면 이 영화 보기를 추천한다.




사진 출처 :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 I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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