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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Jun 24. 2020

<증인>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밋밋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게 되는 이유가 뭘까.


바쁜 와중에 모처럼 영화를 봤다.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은 와중에도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런 소중한 기회에 그냥 아무영화나 볼 순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 영화 저 영화 찾아보다가 작년 개봉작 위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2019년은 워낙 정신없이 보낸 해라 보고싶은 영화는 많았는데 시간이 따라주지 않았다. 2019년에 가장 보고싶었던 영화가 뭘까 싶어 찾아보다가 찾은 영화가 바로 <증인>이었다. 법정물이라는 장르에 자폐아라는 소재가 첨가되었다는 건 꼭 나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 같았다. '자폐'라는 소재를 어떻게 법정극에 소화시킬 것인가, 또 국내영화라는 틀 안에서 어떤 식으로 스토리를 전개할 것이고 관객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이 궁금한 그런 작품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영화는 나쁘지 않았다. 법정물이라는 서사 특유의 긴장감도 어느정도 있었고, 장애아동을 통한 휴머니즘에 가까운 메시지도 있었으며,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큰 지루함이나 불편함도 느끼지 않았다. 영화 전개 전반적으로 밋밋하다는 느낌이 있었으나, 이게 단순히 싱겁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생각보다 신선한 소재인 것 만큼은 사실이다. '살인 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 자폐아동'이라는 설정은 기존에 법정극이 시도하던 클리셰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런 시도를 보았을 때 신파극이라는 장르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동시에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본질에 대해서는 좀 더 깊게 파고드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영화 <증인>도 마찬가지지만 관객이 예상하던 것보다는 좀 더 깊은 물음을 던진다. '좋은 사람'의 기준점을 말이다. 간접적으로 돌려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물음을 통해서 관계와 믿음, 정의와 신뢰, 그리고 편견에 대한 답을 요구한다. 관객은 단순히 영화를 따라가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보다, 스스로 자문하고 답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기가 어렵다. 단도진입적으로 당신이 좋은 사람인지 말이다.




정우성의 연기력은 두 말 할 것 없고, 지우를 연기하는 김향기의 연기력도 자연스러웠다. 사실, 장애아동을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부담감이었을 것이다. '촬영 전, 지우와 같은 친구나 그들의 지인들이 봤을 때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 있었다'라는 배우 본인의 인터뷰에서 볼 수 있듯 적절한 선을 지켜 연기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를 하는 배우는 역할에 대해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더욱 깊게 고민하고 연구해야 한다. 단순히 흉내내기에 불과하지 않을까 했던 걱정과는 달리 김향기의 연기력은 갈수록 자연스러웠었다. 극 초반에는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손떨림이나 음성 반복, 눈동자나 톤까지 인물 성격 특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보였다. 주인공 둘을 제외한 조연 인물들의 역할도 유난히 돋보이는 영화였다. 생각보다 탄탄한 설계 위에 만들어진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들이 역의 흐름을 지루하지 않게 잡아주는 가장 큰 지표 중 하나였지 않나 생각이 든다.




법정극이라는 장르답게 이야기는 사건의 진행에 따라 전개된다. 사건이 발생하면, 목격자가 나오게 되고, 검사와 변호사의 치열한 싸움 끝에 재판은 종료된다. 변할 수 없는 장르적 한계에 진부한 클리셰가 맞부딫힐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 <증인>은 주인공 순호(정우성 분)의 심리/행동 변화를 통해 이야기에 살을 덧댄다. 사실, 재판이 진행되는 법정극을 주 메인 스토리로 두고 있지만 영화를 보고 있자면 주인공의 심리변화에 초점이 더욱 맞춰진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인물의 심리변화가 굉장히 디테일하게 그려지는데, 인물간의 소통을 통해 인물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스토리를 통해 관객에게 메시지를 주입시키기보다, 주인공의 심리를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동화시켜 흐름을 따라가게 만든다. 이 부분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는데 정우성의 연기력이 가장 큰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어설프지 않은 인물 구도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사람'의 기준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스스로 대답하고 동시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순호의 모습은 어쩌면 숭고하기가지 하다. 




신파적 한계를 그대로 답습했다는 점이 가장 큰 실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착하고 따뜻한 캐릭터, 선의 길로 각성하는 주인공, 아버지의 편지와 눈물까지 ... 초반의 긴장감 있는 서사는 어디갔는지 알 수 없고 후반부에는 신파 클리셰 덩어리 범벅이라는 것이 너무 아쉬움에 남는다. 전형적인 전개를 피할 수 없었으면 인위적인 멜로 연출이나 논리를 기반으로 설계된 법정신의 긴장감도 조절했어야 했을텐데, 그 어느것도 사실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주고자 하는 메시지와 기반은 신선했으나 쌓아올린 스토리가 밋밋했다. 현실과의 괴리감도 해결하지 못한 것도 덤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볼만한 가치가 있다. 앞서 말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기 전까지는 영화를 끌 수 없다. 또한 익숙하지만 감성적인 스토리 자체, 신파극을 지루하지 않게 결말까지 끌어낼 수 있다는 것도 꽤나 매력적인 편이다. 인물간의 관계구도를 통해 어느 인물에서 이야기를 바라볼 것인지도 꽤나 중요한 관람포인트가 된다. 여러 번 볼 만큼 '와!최고다!' 할 영화는 아니었지만 한 번쯤은 봐야 할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극을 보면 '때가 좀 묻어야 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성공을 위해 신념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는 이 대사가 현시대에 낮설지 않게 다가온다. 한국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좀 더러워질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처럼 현실에 대한 씁쓸한 반증이기도 하다. 그냥 흘러갈지도 모르는 이 대사가 생각보다 뇌리에 깊게 박혔던 이유는 극 후반에 전개되는 지우의 태도, 그리고 순호의 변화에 대비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될 수 없지만 증인이 될 수 있다던 지우의 말은 연약하지만 강인하다. 때묻지 않았기에 진실에 대한 선택만큼은 확고하다. 함부로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진실을 결정해나가는 지우를 보며 비로소 순호는 성공에 대한 집착을 잊고 신념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변했다'는 말해도 실리를 추구하던 순호가 지우의 용기에 그 '때'를 포기한다. 결국 순호는 사람답게 살기를 택한다. 때묻지 않은 사람으로 말이다. 나는 영화를 보며 인물에 상황에 나를 대입시켜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성공할 수 있는 환경에서 눈을 감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동시에 자기가 지금껏 이뤄왔던 삶을 포기하고 변호사의 의무를 위반함으로써 진실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스스로에게 끈임없이 질문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영화와 현실을 동시에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가 대사에 그대로 드러난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냐는 물음에 마땅히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 수 있을까. 앞서 말했듯 순호는 좋은 사람의 기준을 그대로 따라가려고 노력한다. '장애가 없었으면 참 좋았을텐데요' 라고 무심하게 말했던 처음에서부터 지우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후반부까지 좋은 사람의 기준점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질문에 마땅히 그렇다고 대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고뇌한다. 이내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순간 그는 진짜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자폐아동에 대한 편견과 인식에 대해서도 중한 메시지를 던지는 듯 보이나 아직까지는 부족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든다. 편견에 대한 역설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오히려 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 했지만 ... 인물간의 시선과 사회의 통념이 장애아동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는 너무 직설적으로 메시지를 드러내지 않았나 싶다.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아쉬운 점이 많이 남지만 개인적으로 그것 나름대로 괜찮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억지로 눈물을 쥐어짜내고 싶어 안달난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실제로 영화 후반부에서 울컥하긴 했지만 오열할만큼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사실 영화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 달라서 오히려 흥미롭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변호사와 장애아동! 두 인물에 대한 만남과 교감! 그리고 이를 통한 극복에 대한 대서사시가 펼쳐질 것 같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여러 초점으로 영화가 비춰졌기 때문에 꽤나 지루하지 않게 봤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오히려 그런 내용을 기대하고 간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연출에서도 부족할 것 없었다고 생각한다. 장면 간의 간격도 여유로웠고, 미장센이 돋보이진 않지만 몇몇의 컷과 전개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작품에서 노련미를 쌓은 이한 감독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연출이었다. 익숙하지만 따뜻한 그런 영화가 보고 싶을때 개인적으로 <증인>을 추천하고 싶다.




사진 출처 : 증인 . I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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