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의 끄적끄적 20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by 낭만지리 굴비씨





1.

오후에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박물관에 나와서 전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늘이 뿌연 것이 간혹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날씨가 추워질 것이라는 것을. 좋은 날도 다 갔구나 싶었다. 가을은 늘 그렇듯이 깊어갈 것이다.

문득 적상산이 그리워졌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차는 어느새 박물관 주차장에 들어서 있었고, 내 손에는 쓴 커피가 한 잔 들려 있었다.

"오늘의 커피는 있는데 뜨거운 건 오 분 걸려요."

드라이빙 스루 직원이 웃으며 친절하게 말했지만, 차가운 것을 먹으라는 말이었다. 괜히 짖궂게 '그럼 기다리지요 뭐.' 할까 하다가 그럴 용기도 없어 얼른 받고 뒷차에게 시간을 내주고 만다.

나는 본래 성인 ADHD가 분명하리라 스스로를 판단하고 있을 만큼 부산하고 집중을 원체 못하는 성격이다. 최대 집중력이 한 시간이니, 물이라도 마시러 가거나 화장실이라도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했는지, 시간이 네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물도 한 잔 안 마신 채 원고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한글 창을 띄워놓고 이렇게 써 놓았다.

" - 이 전시는 지리지 박사들이 그동안 어떤 연구를 해왔는가를 알리는 목적이 아님.
- 지역의 관람객들이 우리 지역의 지리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고 지리지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친숙해지는 계기가 되는 데 그 목적이 있음.
- 어떤 방식으로 소통해야 하는가."

머릿속으로는 명절부터 해서 어제 밤도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하긴 했으나, 여기에 명징하게 쓸 것은 못 되어 정해지면 알려드리려 한다. 계속 생각 중에 있는 것이 있어 다행이다 싶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만 나타나는, 그 특별한 몰입의 순간을.

2.

정신을 조금 차리니 노래가 듣고 싶어 지나간 가요 랜덤으로 듣기를 했다. 사실 정확히 플레이리스트를 말하면 '여행스케치 관련 노래 리믹스'가 되겠다. 알아서 비슷한 성향의 노래를 틀어준다.

그러다 한참 지났는지 노래가 신해철까지 와서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가 나오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그냥 배경음악 정도로 치부하고 그냥 넘어갔을 텐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예전 기억이 떠오르다가 점점 선명해졌다.

나에게는 조금은 특이하다면 특이한 능력인데, 무슨 노래를 언제 처음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하는 버릇이 있다. 이 노래는 내가 2003년 8월, 면목동에서 용산으로 가는 새벽 택시가 청계고가를 지날 때 들었던 노래였다.

왜 그렇게 정확히 기억하느냐고?

그것은 그 시간 이후로 내 인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노래 때문에.

3.

몇 차례 글에서 언급을 한 바 있지만, 그해 5월 나는 제대를 하자마자 모아놓은 돈을 다 털어서 좋은 기타를 한 대 샀다. 그리고 매일 노래 연습을 해서 라이브 카페마다 면접을 보러 다니다가, 집이었던 용산에서 멀리 떨어진 면목동에 있는 야간 카페에 합격을 했다. 단, 아르바이트를 하는 조건부였다.

생전 아르바이트도 잘 안 하고 백수같이 살아온 내게 저녁 7시 출근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출근해서 서빙 보고 청소하고 하다가, 다른 가수들의 자리가 비면 내가 가끔 대타를 뛸 때가 있었다.

사실 초년의 열정이 다 그러하듯, 돈 안 받아도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지나니 집에서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학교를 자퇴할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참, 말을 안 했는데, 늘 12시 30분 정도에 면목동에서 끝이 나는지라 심야버스도 없던 그때 나는 어떻게든 집으로 가야 했다. 택시를 가끔 타보기도 했지만 비쌌고, 자전거로도 가보고 걸어서도 가 봤고, 밤을 PC방에서 새보기도 하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 시절, 새벽이 나에게는 서울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새벽에 깨어 있는 어느 건물이나 들어갔었다. 만화방에서 새벽잠을 자던 기억을 나는 잊지 못할 것 같다. 6시까지 눈을 붙이다 버스 타고 집에 오던 그때...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고 어리석었지만, 그때의 나는 진짜로 살아있었다. 매일 밤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고, 새벽 서울의 고독한 풍경 속에서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해 가고 있다고 믿었다.

4.

그 카페에서 사장님이 워낙 유쾌하고 경력이 화려해서 할 이야기가 많지만, 그것은 나중에 더 하도록 해야겠다. 내가 살면서 본 유일한 성씨였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한국에 200명 있다고 한다.

카페는 내가 있는 석 달 동안 경영이 악화되더니 결국 폐업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사장님은 문을 닫는 날까지도 웃음을 잃지 않았는데, 그는 나중에 무슨 보틀인가 써진 텀블러를 팔아서 대박을 내게 된다.

사장님은 마지막 날 온 유일한 손님의 계산한 돈을 내게 다 주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택시 타고 가라고 했다.

나는 왠지 그 말을 어기면 안 될 것 같아, 새벽 한 시 무렵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려 했다. 귀에는 늘 하던 대로 요새 유행하는 노래들 리스트를 틀고...

그때가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사라진 청계고가를 타고 가는 서울의 야경은 무언가 쓸쓸한 운치가 있었다. 약간 중경산림과 타락천사의 밤 풍경을 섞어놓은 느낌이었는데, 그 뽕에 취할 무렵 신해철의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가 흘러나왔다.

예전에도 몇 번 들었던 노래였다.

그런데 노래라는 것은 확실히 언제, 어떤 때에, 어느 기분에서 듣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이 노래의 가사 한 자, 한 자가 활자처럼 머리에 박히기 시작했다.

청계천의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 나이를 퍼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이거 아니면 죽음 정말
이거 아니면 끝장 진짜
내 전부를 걸어보고 싶은
그런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노래를 중간도 다 안 들었는데, 너무 정신이 고양이 되어서 각성이 된 느낌이 되었다.

난 지금 진정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그냥 살아있어서 어제와 같은 타성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정말 하고 싶고 전부를 걸고 싶은 건 또 뭔가.

택시 창밖으로 흐르는 서울의 밤은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나를 슬프게 했다. 스물셋의 나는, 매일 밤 노래를 부르며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 노래를 듣고 나서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내 책상에 핸드폰을 놔두고 꽃동네로 한 달간 장기 봉사를 떠났다.

뭔가를 알아보려고.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으려고.

5.

지금 다시 신해철의 이 노래를 듣는다.

이제는 정신의 고양이 된다거나 마음이 설렌다거나 내 자신이 부끄럽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22년 전의 나 자신이 느꼈던 감정에 둔감해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밤 열 시에 내가 쓰고 있는 전시회 원고가 진정 내가 원하고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말이다.

2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수없이 헤맸고, 수없이 방황했고, 수없이 넘어졌다.

청계고가는 사라졌고, 그 야간 카페도 사라졌고, 그때의 사장님과도 연락이 끊겼다. 스물셋의 나는 이제 마흔다섯이 되었고, 기타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어딘가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날 밤 택시 안에서 들었던 그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리고 이제야, 22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 답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사람들에게 지리지를 알게 하고, 함께 웃고 행복하게 하는 것.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이 내가 네 시간 동안 물도 안 마시고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이것이 내가 밤 열 시에도 원고를 쓰고 있는 이유다.

스물셋의 나는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싶었다. 마흔다섯의 나는 전시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지리지를 전하며 행복하게 하고 싶다.

방법은 달라졌지만, 본질은 같았다.

'이거 아니면 죽음 정말, 이거 아니면 끝장 진짜'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진짜로 원하는 것은 거창한 게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싶은 마음, 밤늦게까지 일해도 지치지 않는 열정, 사람들의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를 보며 느끼는 뿌듯함, 그런 작고 소소한 것들 속에 있다는 것을.

오늘도 비가 내리고, 가을은 깊어간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계절의 죄인이 아니다.

나는 지금,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까.

22년 전 청계고가 위를 달리던 택시 안에서, 스물셋의 내가 찾으려 했던 그 답을 마흔다섯의 나는 지금 이 순간 살아내고 있으니까.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그냥 되는 대로 사니.

아니다.

나는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산다.

진짜로 원하는 것을 향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걸어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으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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