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도에서 꽃내음이 날 때
박물관 수장고는 언제나 서늘합니다.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수백 년 묵은 종이와 먹 냄새만이 감도는 이 건조한 공간에서, 가끔 코끝으로 훅 하고 꽃내음이 끼쳐 올 때가 있습니다. 물론 진짜 꽃향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지도는 펼치는 순간, 굳어있던 감각을 깨우고 마음에 봄바람을 불어넣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무장현지도(茂長縣地圖)』가 바로 그런 지도입니다.
이 지도는 1872년(고종 9년), 정부의 명령으로 제작된 지방지도 중 하나입니다.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일대를 그린 것이지요. 보통 관청에서 만든 지도라고 하면 딱딱하고 엄숙할 것 같지 않나요? 도로와 관청 건물을 흑백으로 그리고, 인구수와 곡식의 양을 적어 넣은 건조한 보고서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 지도는 다릅니다. 지도를 그린 화원은 아마도 행정적인 의무감보다, 눈앞에 펼쳐진 봄의 정취에 더 취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2. 관청 지도에 핀 벚꽃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지도의 중심에는 무장읍성(茂長邑城)이 둥글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벽은 단단해 보이지만, 그 안의 풍경은 한없이 부드럽습니다. 관아 건물들 사이사이에, 그리고 성벽 너머 언덕 위에 분홍색과 붉은색 점들이 흐드러지게 찍혀 있습니다.
바로 꽃나무입니다. 복사꽃일까요, 아니면 벚꽃일까요? 화가는 붓끝에 붉은 물감을 듬뿍 찍어 톡톡 두드리듯 봄을 그려 넣었습니다. 바야흐로 춘삼월, 호남의 들판에 봄기운이 완연할 때였나 봅니다.
엄격해야 할 군사·행정 지도에 이토록 낭만적인 꽃놀이 풍류를 담아내다니요. 아마도 지도를 그리던 날, 성 안에는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고 어디선가 꽃가루가 날아왔을 것입니다. 화가는 붓을 멈추고 생각했겠지요. '이 아름다운 봄날을 빼놓고 어떻게 이 고을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인지 이 지도에는 유독 '사람 냄새'가 납니다. 묵은 종이 냄새 대신 향긋한 봄바람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옵니다.
3. "자네, 살아 있었구먼!"
이제 시선을 읍성에서 서쪽 바다로 돌려봅니다. 지도의 왼쪽, 서해 바다가 넘실거립니다. 그곳에 배들이 떠 있습니다. 고기를 잡는 어선과 사람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가 보입니다.
지도 속의 배는 멈춰 있지만, 제 눈에는 그 배가 물살을 가르며 포구로 들어오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겨울바다의 거친 파도를 이겨내고, 혹은 긴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배입니다. 나루터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습니다.
배가 닿고, 사람들이 내립니다. 옷차림은 가벼워졌고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습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서로의 손을 맞잡습니다. 지도 속의 저 두 사람은 아마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을까요?
"어이, 김 서방!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먼?" "아이고, 박 형님. 살아 있으니 이렇게 또 얼굴을 보네요. 지난겨울은 참말로 춥고 길었지요."
지도는 소리 없는 기록이지만, 마음의 귀를 열면 왁자지껄한 장터의 소리와 안부를 묻는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스쳐 가고, 물러나고, 다시 만나는 사람들.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 지도 위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4. 우리의 마음에 봄이 온다는 것
봄입니다. 태양의 고도가 높아지고 그림자는 짧아집니다.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서 고양이는 나른하게 하품을 하고, 아이들은 새 옷을 입고 뛰어다닙니다. 꽃놀이는 단순히 꽃을 보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심연에 잠들어 있던 풍류와 생명력을 다시 발화시키는 의식과도 같습니다.
『무장현지도』를 보며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지도 속 세상은 이미 꽃대궐인데, 제 마음은 아직 겨울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요. 세상살이가 팍팍하다고, 할 일이 많다고,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웅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자연의 이치는 참으로 정직합니다. 아무리 혹독한 추위도 봄바람 앞에서는 물러서고 맙니다. 얼었던 땅이 녹고 그 틈으로 새싹이 돋아나듯, 우리의 닫혔던 마음도 봄눈 녹듯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먼." 이 투박한 인사가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립고 고맙게 느껴집니다. 살아 있다는 것,
그래서 다시 봄을 맞이하고 꽃을 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축복받은 존재들이니까요.
오늘, 당신의 마음 지도는 어떤가요? 아직 흑백의 겨울인가요, 아니면 분홍빛 꽃망울이 터지고 있나요? 박물관의 유리창 너머로, 150년 전 무장현의 봄바람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꽃이 만개한 고지도, 참으로 예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