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연이 역사를 만들다: 홍양한의 지도 한 장
역사는 필연과 우연의 절묘한 이중주로 흘러갑니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우연 하나가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 지리학의 폭발적 발전도 바로 그런 우연한 순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757년(영조 33년) 무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서른한 살의 젊은 관리 홍양한(洪良漢)이 영조 임금과 독대하고 있었습니다. 영조가 묻습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어떠한가?"
홍양한은 소매 속에 넣어두었던 낡은 지도 한 장을 꺼내 임금 앞에 펼쳤습니다. 그것은 40년 전, 재야의 학자 정상기(鄭尙驥)가 그렸던 <동국지도(東國地圖)>였습니다.
"전하, 이 지도를 보시옵소서. 백 리를 한 자(尺)로 축소하여 그린 것인데, 산천과 도로의 험하고 평탄함이 손바닥 보듯 환합니다."
일흔을 바라보던 노회한 군주 영조의 눈이 반짝였습니다. "내 나이 칠십에 이르도록 수많은 지도를 보았으나, 이처럼 정밀하고 훌륭한 지도는 처음 보는구나!"
영조는 즉시 명을 내립니다. "이 지도를 본떠 전국의 지도를 새로 제작하고, 각 고을의 읍지(邑誌)를 빠짐없이 수집하여 올리라." 이 한마디로 조선 팔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전국의 군수와 현감들이 부랴부랴 지도를 그리고 읍지를 편찬하느라 땀을 흘려야 했지요. 이 거대한 국책 사업의 시작은 홍양한이라는 젊은 신하가 무심코 꺼내 든 지도 한 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홍양한은 불쏘시개였습니다. 그 불을 받아 조선 지리학이라는 거대한 용광로를 달굴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1712-1781)입니다.
2. 순창 가는 길: 내비게이션에 없는 묘소를 찾아서
2019년 5월의 끝자락, 저는 전라북도 순창으로 향했습니다. 이름만 들어본 동네, 솔직히 아는 것이라고는 고추장과 대학 시절 지리 시험 단골 문제였던 '구곡순담(구례·곡성·순창·담양: 장수 벨트)' 정도였습니다.
운전대 너머로 초여름의 더위가 땀처럼 맺히는 날이었습니다. 내비게이션에 '신경준 묘소'를 쳤지만, 화면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습니다. 250년 전 조선의 산천을 샅샅이 기록했던 대지리학자의 묘소가 정작 현대의 지도에는 없다니, 묘한 아이러니였습니다.
표지판 하나에 의지해 달렸습니다. '신경준 묘소 5km'. 길은 점점 좁아지더니 급기야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드르륵, 콰직!' 중고차 바닥이 돌부리에 긁히는 처참한 소리가 계곡에 울렸습니다.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차를 돌릴 공간은 보이지 않았고, 뒤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 직진이다. 신경준을 만나기 전엔 후진은 없다.'
그렇게 덜덜거리는 차를 몰고 산길 끝에 다다르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거대한 바위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너머, 단정하게 다듬어진 묘역이 고요히 누워 있었습니다. 마치 그가 쓴 호 '여암(旅菴, 나그네의 암자)'처럼, 세상의 소란에서 한발 물러난 적막한 풍경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이 위대한 지식인의 흔적을 조용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차에서 내려 옷매무새를 다듬고 그 앞에 섰습니다.
3. 천재라는 말로는 부족한 사람
신경준. 흔히 위백규, 황윤석, 하백원과 함께 '호남의 4대 천재'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천재'라는 말만으로는 그의 방대하고 깊은 학문 세계를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한때 그를 과소평가했습니다. '그저 실력 있는 여러 학자 중 한 명이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고지도와 지리지의 세계를 파고들면 들수록, 저는 매번 신경준이라는 거대한 벽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도로, 산맥, 강줄기, 지도 제작법, 훈민정음 연구... 18세기 조선의 지식 생태계 어디를 찔러봐도 신경준의 이름이 튀어나오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이론가가 아니었습니다. 영조는 그에게 국가 지리 정보 사업의 전권을 맡겼습니다. "전국 335개 고을의 지리지를 모두 교정하라." "정상기의 지도를 바탕으로 더 정밀한 지도를 그려라."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조선 최대의 관찬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감수와, 국가 백과사전 <동국문헌비고>의 지리 파트인 '여지고(輿地考)'입니다. 일개 선비에게 국왕이 나라의 땅 정보를 통째로 맡긴 것입니다.
그가 남긴 업적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단연 **<산경표(山經表)>**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山自分水嶺)." 이 명쾌한 원리에 따라 우리 국토의 뼈대인 백두대간과 정맥들의 족보를 정리한 책입니다. 오늘날 등산객들이 가슴에 품고 다니는 바로 그 '백두대간' 개념을 확립한 사람이 신경준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그는 <훈민정음운해>를 쓴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고, <도로고>를 통해 전국의 길을 정리했으며, <가람고>로 사찰 정보를 집대성했습니다. 문과 이과를 넘나드는 진정한 '융합형 인재'였습니다.
4. 붓으로 그린 바다, 마음으로 그린 국경
신경준은 지도를 '잘' 그린 사람이 아니라, '독보적'으로 그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상기의 지도를 이어받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서양 지도의 장점인 '격자(Grid)' 방식을 도입해 정확성을 높였고, 정보의 양을 획기적으로 늘렸습니다.
그의 수많은 지도 중 제가 가장 아끼는 두 점이 있습니다. <강화이북해역도>와 <북방강역도>입니다. <강화이북해역도>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보통의 지도는 바다를 파랗게 칠하거나 빈 공간으로 남겨둡니다. 하지만 신경준은 달랐습니다. 그는 바다 밑에 숨겨진 암초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그려 넣었습니다. "이 배는 여기로 가면 좌초된다. 저쪽 물길은 썰물 때 위험하다." 어부들의 거친 목소리를 직접 듣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릴 수 없는 '바다의 지뢰밭 지도'였습니다. 책상물림 학자가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이 지도 위에 박혀 있었습니다.
반면 <북방강역도>는 너무나 회화적이고 아름다워서 충격적입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굽이치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마치 활시위처럼 팽팽하고 우아한 곡선으로 표현했습니다. 이토록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지도 위에서는 붓을 춤추듯 놀리며 강산의 기운을 담아낸 것입니다.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동시에 가진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지도였습니다.
5. 낙엽귀근(落葉歸根): 땅으로 돌아가다
중국 영화 중에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친구의 시신을 고향에 묻어주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떨어진 잎은 뿌리로 돌아간다.'
순창의 묘소 앞에 서서 그 말을 되뇌었습니다. 신경준은 평생을 바쳐 우리 땅의 뿌리(산맥)와 줄기(도로, 물길)를 찾고 기록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이 땅을 속속들이 알고 사랑했던 사람. 그는 결국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땅의 품으로, 고향 순창의 흙으로 돌아와 낙엽처럼 고요히 누워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남긴 방대한 저술인 <여암전서>는 아직도 온전히 번역되지 못했습니다.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난해하기 때문이라지만, 후학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땅의 족보를 만들어준 분에게 우리는 아직 빚을 갚지 못한 셈입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산길을 내려오며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어둠 속에 잠긴 순창의 산자락이 거대한 붓질처럼 보였습니다. 신경준이 그렸던 그 힘찬 산맥의 선처럼 말입니다.그는 갔지만, 그가 남긴 백두대간의 뼈대는 오늘도 우리 국토를 굳건히 지탱하고 있습니다. 땅을 사랑한 사람은 흙으로 돌아갔지만, 그 사랑의 기록은 영원히 남아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