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조선의 눈으로 본 이웃

by 낭만지리 굴비씨

1. 1471년의 어느 겨울날, 왕에게 바쳐진 책

잠시 시계를 500년 전으로 돌려볼까요? 1471년(성종 2년) 12월,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경복궁의 어느 전각 안입니다. 이제 갓 열다섯 살이 된 소년 왕 성종 앞에, 백발이 성성한 노대신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습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책 한 권을 왕에게 바칩니다. 그의 이름은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세종대왕부터 문종, 단종, 세조, 예종을 거쳐 성종까지 무려 여섯 임금을 모신 조선 최고의 외교관이자 경세가였습니다.

그가 바친 책의 이름은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바다 동쪽의 여러 나라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전하, 바다 건너 왜국과 유구국은 성질이 사납고 교활하여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을 제어하려면 그들의 산천과 풍속, 그리고 오가는 뱃길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알아야 하옵니다. 늙은 신이 평생 보고 들은 것을 모아 이 책을 올리니, 부디 훗날의 거울로 삼으소서."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노대신이 어린 왕과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며 남긴 '국가 안보 보고서'이자, 당시 조선이 파악하고 있던 동아시아의 모든 정보를 집대성한 '최고 기밀 지도책'이었습니다.

책을 펼치면 지금 우리의 상식과는 조금 다른, 기이하고도 매혹적인 지도들이 나타납니다. 어떤 섬은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고, 어떤 바닷길은 붉은 선으로 선명하게 그어져 있습니다. 도대체 500년 전 조선 사람들은 이웃 나라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요? 오늘은 그 오래된 지도 속에 숨겨진 '생존의 비밀'을 읽어보려 합니다.


2. 왜구의 바다, 그리고 27세 청년의 모험

지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그 지도가 왜 필요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15세기 조선의 바다는 낭만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공포의 공간이었습니다.

고려 말부터 창궐한 왜구(倭寇)는 해안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힘없는 백성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부산 앞바다에 정체불명의 배가 나타났다는 봉화가 오르면 조정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저 배가 물건을 팔러 온 상선인지, 칼을 들고 약탈하러 온 해적선인지 구분할 수 없었으니까요.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왜구와 싸우기 위해서는, 아니 그들을 달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절실했습니다. 그들이 어디서 오는지, 소굴은 어디인지, 누구의 지배를 받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이 막중한 임무를 띠고 현해탄을 건넌 사람이 바로 청년 신숙주였습니다. 1443년, 그의 나이 불과 스물일곱이었습니다. 그는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7개월 동안 교토에 머물렀습니다. 신숙주는 천재적인 언어학자였습니다. 그는 통역관을 거치지 않고 일본의 승려, 관리들과 직접 대화하며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낮에는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그들의 마음을 샀고, 밤에는 등불 아래서 그들의 지리와 정치 구조를 꼼꼼하게 기록했습니다. 마치 현대의 첩보원처럼 말이죠. 그 치열했던 7개월의 기록이 30년의 세월을 숙성시켜 『해동제국기』라는 걸작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3. 일본 지도: 추상화에서 내비게이션으로

『해동제국기』에 실린 「일본본국지도」를 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됩니다. 당시 일본인들 스스로가 그리던 지도와는 전혀 달랐거든요.

옛날 일본에는 '행기도(行基圖)'라는 전통적인 지도가 있었습니다. 둥글둥글한 모양에 68개의 행정구역(국, 國)만 표시된, 마치 추상화 같은 지도였습니다. "우리나라 행정구역이 이렇게 생겼어"라고 보여주는 내부용 지도였지요.

하지만 신숙주의 지도는 달랐습니다. 조선이 필요한 것은 '행정구역'이 아니라 '길'이었습니다.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붉은 선이 보이나요? 부산포에서 시작해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의 주요 항구인 아카마세키(지금의 시모노세키), 효고우라에 이르는 뱃길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카마세키에서 가마도세키까지 350리"라는 식으로 주요 지점 간의 거리가 '리(里)' 단위로 꼼꼼하게 적혀 있습니다. 추상적인 그림이 아니라, 당장 배를 띄워 찾아갈 수 있는 '실전용 내비게이션'이었던 셈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지도에 적힌 정보들입니다. 일본 천황이 사는 곳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권력자인 쇼군(장군)의 거처, 그리고 호소카와, 야마나 같은 유력한 다이묘(영주)들의 세력권까지 표기했습니다. "누가 진짜 실세인가? 누구와 손을 잡아야 왜구를 막을 수 있는가?" 이 지도는 단순한 지리 정보가 아니라, 조선의 외교 전략이 담긴 '정치 지형도'였습니다. 조선은 멍하니 당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지도를 통해 상대를 분석하고,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4. 유구국 지도: 조선의 눈으로 편집하다

지금의 오키나와인 유구국(琉球國)은 15세기 동아시아 무역의 핫플레이스였습니다. 조선에게는 왜구에게 잡혀간 백성들을 송환해오는 외교 파트너이자, 남방의 진귀한 물산을 얻는 교역국이었지요.

1453년, 조선 궁궐에 '도안(道安)'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찾아옵니다. 일본 하카타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승려이자 상인인데, 유구국 사신을 자처하며 지도 한 장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해동제국기』 유구국 지도의 원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조선이 이 지도를 그대로 베끼지 않고 '악마의 편집'을 했다는 점입니다. 원본 지도에는 무역 항구인 '하카타'가 기준점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지도에서는 이를 '가미마쓰우라(上松浦)'로 바꿨습니다. 왜일까요? 가미마쓰우라는 당시 왜구들의 주요 근거지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에게는 '돈이 되는 무역항'보다 '우리를 위협하는 적의 기지'가 어디인지 아는 게 훨씬 중요했던 겁니다.

또 하나, 원본에 가득했던 불교 사찰과 일본 신사의 이름들을 조선 버전에서는 과감히 지워버렸습니다. 유교 국가인 조선의 입장에서 "오랑캐의 미신적인 정보"는 알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이를 통해 우리는 조선이 외부의 정보를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국익과 이념에 맞춰 주체적으로 필터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대마도 지도: 찌그러진 것이 아니라 확대한 것이다

『해동제국기』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대마도 지도」입니다. 이 지도를 처음 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우리가 아는 대마도는 남북으로 길쭉한 고구마 모양인데, 이 지도에서는 마치 말발굽처럼 'C'자 형태로 심하게 구부러져 있거든요.

"옛날 사람들이라 측량 기술이 부족해서 엉터리로 그렸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천만에요. 조선은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도를 자세히 보면 무려 82개의 포구와 마을 이름이 깨알같이 적혀 있습니다. 오길순 선생의 디지털 분석에 따르면, 비록 전체 모양은 왜곡되었지만 각 포구의 상대적인 위치 관계는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멀쩡한 섬을 이렇게 구부려 뜨려 놓았을까요? 비밀은 대마도의 심장부, '아소만(淺茅灣)'에 있습니다. 섬의 허리 부분에 있는 아소만은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이루어져 있어 배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인 곳입니다. 바로 왜구들의 소굴이자, 1419년 이종무 장군이 이끈 조선의 정벌군이 상륙작전을 펼쳤던 곳이지요.

조선의 지도 제작자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대마도의 겉모양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적의 소굴인 아소만 내부다!" 그래서 그는 아소만을 중심으로 섬의 위아래를 과감하게 꺾어버렸습니다. 마치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아소만을 활짝 펼쳐서, 그 안에 숨어있는 작은 포구 하나, 왜구의 은신처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그려 넣은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의 '지하철 노선도'와 같은 원리입니다. 실제 지형을 무시하더라도 역과 환승 정보를 정확히 보여주는 게 목적인 것처럼, 대마도 지도는 지리적 정확성보다 군사적 효율성을 극대화한 '특수 작전 지도'였던 것입니다. 500년 전 지도 제작자의 그 대담한 발상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6. 일기도 지도: 첩보전의 결정체

마지막으로 살펴볼 「일기도(이키섬) 지도」는 조선 정보력의 결정체입니다. 대마도와 규슈 사이에 있는 작은 섬 일기도. 조선이 직접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도에는 놀라운 디테일이 숨어 있습니다.

지명을 한번 볼까요? '후나코시(船越)'를 '훈내고시(訓乃古時)'로, '구로사키(黑崎)'를 '구로사지(仇老沙只)'로 적어 놓았습니다. 한자의 뜻이 아니라, 일본어 발음을 들리는 대로 한글식 이두로 적은 것입니다. 이는 일본인이 준 지도를 베낀 것이 아니라, 조선의 관리가 현지에 가서 직접 귀로 듣고 발로 뛰며 정보를 수집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심지어 지도에는 "사지 대관", "호자 대관"이라며 이 작은 섬이 어떤 다이묘의 부하들에 의해 쪼개져 통치되고 있는지까지 적혀 있습니다. 적진 깊숙한 곳의 정치 권력 구조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지요.


7. 에필로그: 지도는 살아남으려는 자의 기록이다

신숙주가 성종에게 『해동제국기』를 바치며 했던 유언 같은 당부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조선의 대일 외교를 뒷받침하는 바이블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류성룡이 가장 먼저 찾았던 책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박물관 유리 진열장 안에 조용히 누워 있는 『해동제국기』. 하지만 그 지도들 속에는 500년 전, 거친 파도를 넘으며 적의 정세를 살폈던 젊은 외교관의 열정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 밤을 새워 지도를 그렸던 선조들의 치열한 고민이 붉은 핏줄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행을 가기 위해 지도를 폅니다. 맛집을 찾고, 예쁜 풍경을 보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살아남기 위해 지도를 폈습니다. 가족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낯선 땅의 지도를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오늘, 스마트폰 지도를 무심히 넘기다 문득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평화로운 영토와 바다는, 그 옛날 붓과 종이로 세상을 치열하게 기록했던 그분들의 '지도' 위에 서 있다는 것을요. 낡고 비틀어진 고지도가 건네는 묵직한 위로와 감동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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