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 백두산보다 크게 그려진 이유

by 낭만지리 굴비씨

1. 고지도 연구자의 소박한 고백


요즘 들어 제가 쓰는 고지도 이야기를 읽고 연락을 주시는 분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이 지도는 무슨 뜻인가요?", "저 기호는 왜 저기에 있나요?" 순수한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질문들을 받을 때마다 저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격적인 지도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 마음속의 작은 고백을 먼저 꺼내놓으려 합니다. 사실 저는 고지도를 직접 만지고 복원하는 기술자라기보다는, 책상 앞에 앉아 이론을 파고드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만약 디지털 시대가 오지 않아서, 박물관 수장고 깊숙한 곳에 있는 지도들이 인터넷이라는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이 많은 보물과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시대를 잘 타고난 행운아인 셈이지요.


그리고 한국의 고지도 연구 분야에는 저보다 훨씬 훌륭한 선배 연구자분들이 수십 분이나 계십니다. 저는 그분들 틈에서 15년째 '영원한 막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후배들이 이 아름다운 학문의 길로 더 많이 들어와서 저를 '선배님'으로 만들어주면 좋으련만, 현실은 녹록지 않아 마음이 아플 때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고백하건대, 저는 여전히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매일 아침 모니터 속에 띄워진 고지도 앞에 앉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주하는 것은 거대한 지식의 벽과 저의 무지입니다. 사실 제가 연재하는 이 이야기들은 대단한 학술적 성과가 아니라, 매일매일 떠오르는 엉뚱한 의문과 그 답을 찾아 헤매는 저의 '좌충우돌 탐구 일기'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도 정답을 알려드리는 강의가 아닙니다. "어? 이건 왜 이렇지?" 하고 함께 고개를 갸웃거리는 즐거운 수다의 시간으로 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2. 오늘의 엉뚱한 질문: 금강산 vs 백두산


오늘 저를 사로잡은 화두는 이것입니다. "고지도에서 언제부터 금강산이 백두산보다 크게 그려졌을까?"

"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당연히 백두산이 제일 큰 산 아닌가요?" 이렇게 반문하실 분들이 많을 겁니다. 저도 오늘 지도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깨달았으니까요.


김정호의 걸작 <대동여지도>(1861년)를 한번 펼쳐보겠습니다. 이 지도는 조선의 국토를 가장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그렸다고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지도의 오른쪽, 강원도 부분을 보면 뾰족뾰족한 바위산들이 뭉쳐 있는 곳이 유독 거대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바로 금강산입니다. 실제 높이로 따지면 백두산(2,744m)이 압도적으로 높고, 산덩어리의 크기로 따지면 지리산이 훨씬 웅장합니다. 금강산(1,638m)은 높이로만 보면 이 형님들 축에 끼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 위에서는 금강산이 백두산보다, 지리산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치 "내가 조선 최고의 산이다!"라고 외치듯이 말이죠. 도대체 언제부터, 왜 금강산은 지도 위에서 거인이 되었을까요?


3.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지도 여행


궁금증이 생기면 참을 수 없지요. 저는 타임머신을 타듯 옛 지도를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며 범인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1861년, 대동여지도] 범행(?) 현장입니다. 금강산은 확실히 백두산보다 큽니다. 김정호 선생은 금강산을 아주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1855년경, 동여도] <대동여지도>의 밑바탕이 된 지도입니다. 여기서도 금강산, 설악산, 지리산은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반면 백두산 옆에 있는 장백산은 크기가 좀 작아졌네요. 여전히 금강산의 위세가 대단합니다.


[1750년경, 정상기의 동국지도] 시계를 100년 전으로 돌려 영조 시대로 갑니다. 정상기의 지도를 보니 분위기가 다릅니다. 전국지도에서는 금강산이 그리 강조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설악산은 표시조차 안 되어 있습니다. (이건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대신 지리산과 장백산이 아주 크게 그려져 있고, 백두산도 강조되어 있습니다. 1712년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면서 국경 문제로 백두산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라 그런 것 같습니다.


[1713년, 윤두서의 동국여지지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공재 윤두서의 지도에서도 금강산과 설악산은 그저 '여기에 산이 있다' 정도로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반면 백두산은 아주 크고 뚜렷하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역시 이 시기의 주인공은 백두산이었군요.


[1680년경,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 그런데 숙종 때 그려진 이 지도에서는 또 재미있는 현상이 보입니다. 백두산은 이미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신격화되어 강조되어 있는데, 금강산도 다른 산들과 달리 톱날처럼 뾰족뾰족하고 두드러지게 그려져 있습니다. 어라? 금강산 사랑은 꽤 오래된 것일까요?


[1450년경, 조선 전기 팔도지도] 아주 먼 옛날로 가봅니다. 이 지도에서 금강산은 그저 평범한 산줄기 중 하나일 뿐입니다. 설악산은 아예 이름도 없습니다. 오직 백두산만이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강조되어 있습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지도의 주인공은 단연코 백두산 하나뿐이었습니다.

4.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도를 쭉 늘어놓고 보니 어렴풋이 흐름이 보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건국의 발상지인 백두산이 절대적인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러다 숙종, 영조 시대를 거치며 국경 문제로 백두산의 중요성은 계속 유지되지만, 18세기 이후 '금강산 유람' 붐이 일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금강산이 점점 커졌던 것은 아닐까요? 김정호가 살던 19세기에 이르면 금강산은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1순위였으니, 그 마음의 크기가 지도에 반영되어 실제보다 더 거대하게 그려진 것은 아닐까요?

물론 이것은 저의 추측일 뿐입니다. "정상기나 신경준 계열의 지도는 전도(전체 지도)에서는 금강산이 작지만, 도별(상세) 지도에서는 또 크게 그렸는데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라고 묻는다면, 저는 솔직히 대답해야 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네, 결론은 '모름'입니다. 팩트는 "김정호의 지도에서 금강산이 가장 크게 강조되었다"는 것뿐이고,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왜 이런 경향이 생겼는지는 아직 불분명합니다.


5. 에필로그: 모르는 것을 아는 즐거움


"에이, 전문가라면서 모른다고 끝내요?"라고 실망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모름'의 순간이 참 좋습니다. 고지도를 바라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오르고, 그 질문을 해결하려다 보면 또 다른 모르는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납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조선의 역사, 문화,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씩 배워갑니다.


누군가에게 <대동여지도>는 그저 낡은 종이 한 장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 지도는 약 11,760여 개의 지명, 3,000여 개의 산, 1,100여 개의 섬, 334개의 고을이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우주이자 백과사전입니다.

저는 오늘도 그 우주 속을 여행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정답을 찾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궁금해하고, 찾아보고, 상상하는 그 시간 자체가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니까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오늘 지도 한 장을 펴놓고 엉뚱한 질문 하나 던져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 동네 산은 왜 이렇게 뾰족하게 그렸을까?" 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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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대동여지도(1861, 목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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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동여도(1855년경, 채색필사) -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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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동여도(1855년경, 채색필사) - 설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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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동여도(1855년경, 채색필사) -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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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동여도(1855년경, 채색필사) -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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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기, 동국지도(계열) (175년경, 채색필사) -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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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기, 동국지도(계열) (175년경, 채색필사) - 설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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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기, 동국지도(계열) (175년경, 채색필사) -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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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기, 동국지도(계열) (175년경, 채색필사) -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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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동국여지지도(1713년경, 채색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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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미상, 해동산악봉화팔도지도(1680년경, 채색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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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미상, 해동산악봉화팔도지도(1680년경, 채색필사) -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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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미상, 해동산악봉화팔도지도(1680년경, 채색필사) - 설악산 (한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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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미상, 해동산악봉화팔도지도(1680년경, 채색필사) -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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