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미시적인 지리지, <훈도방주자동지>

by 낭만지리 굴비씨

1. 400년 전 서울의 골목 이야기


서울역사박물관에는 조선의 숨결을 품은 지리지『훈도방주자동지』가 고요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리지라 하면 딱딱할 것 같지만, 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오래된 골목이 스스로 말문을 여는 듯합니다. 17세기 초 한양 남산 자락 주자동(鑄字洞)—오늘의 명동·충무로 사이—의 내력과 풍속, 사람살이를 세심하게 담아낸 책이지요.

군현 단위가 보통이던 당시, 한 동(洞)만을 기록 했다는 점에서 드문 정성과 시선이 느껴지며, 그 따뜻한 시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조용한 위로처럼 다가옵니다. 작은 동네 하나의 역사일 뿐인데, 읽다 보면 마치 서울 전체의 심장박동을 손끝으로 더듬는 기분이 듭니다.


책의 편찬에는 지역 인사들의 뜻이 모였고, 서문과 발문은 당대의 중신들이 맡았습니다. “작은 동네라도 귀감이 되는 마음과 품격을 남겨야 한다”는 의지가 문장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행정 정보를 넘어 생활사(生活史)이자 인간학의 기록처럼 읽힙니다. 누군가의 집 대문, 우물, 제사터, 바람이 드나들던 골목길까지—사소해 보여 지워지기 쉬운 장면들이 모여 한 시대의 품격을 이루고 있음을 조용히 일깨웁니다.


2. 일곱 갈래로 엮은 동네의 지도


첫째, '공관(公館)' 편은 이 지역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주자동은 활자를 주조하고 책을 찍던 관청이 있던 곳, 글자를 ‘주조’하던 동네라는 뜻이 지명에 그대로 배어 있습니다. 쇳물이 끓고 식던 밤의 공기, 균형 맞춰 깎인 활자 한 글자에 묻은 장인의 숨결을 떠올리다 보면, ‘지리’가 곧 문화의 공장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오늘의 인쇄 골목 풍경과 겹쳐 보면, 시간의 띠가 한 줄로 이어진 듯하지요.


둘째, '고적(古跡)'에는 남산 국사당 근처의 우물, 작은 폭포, 제사를 지내던 터 같은 공간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지도에는 점 하나로 표시될 뿐인 장소지만, 책은 그 점에 빛과 소리와 냄새를 되돌려 줍니다. 비 뒤에 돌계단을 타고 내려오던 물방울의 떨림, 제사를 앞두고 이웃들이 모이던 발자국 소리까지—그 풍경이 지금 우리의 상상 속에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셋째, 풍속(風俗)은 혼사·상사에 서로 돕던 인정과 향약의 규범을 전합니다. 살림살이의 무게를 공동체가 나누어 들던 방식, 말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던 예의를 읽다 보면, ‘좋은 이웃’이라는 낱말이 한층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지도에서 경계선을 긋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경계 안에서 사람이 서로 기대는 방법이었음을 책은 이야기합니다.


이어지는 효자(孝子)와 절부(節婦) 항목은 신분을 막론하고 귀감이 되는 삶을 기록합니다. 부모를 모신 한 사람의 꾸준한 마음, 지조를 지킨 한 여성의 고요한 결심—이 전기(傳記)들은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작고 꾸준한 선의가 어떻게 동네의 품격이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읽다 보면 “나도 오늘 하나의 작은 선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레 생깁니다.


마지막으로 명환(名宦)은 이 동네와 인연 깊은 인물들의 족적을 모아 사람들의 지도를 펼쳐 보입니다. 이름난 관료와 학자들, 의를 지킨 선비들의 짧은 약력은 동네의 골격이 단지 지형과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선택과 기억으로 세워져 있음을 알려 줍니다. 이름보다 소리, 권력보다 온기가 먼저 전해지는 구성입니다.


3. 활자의 마을을 걷는 시간 여행


이 지리지를 읽으면 자연스레 시간 여행을 하게 됩니다. 장인들이 밤을 지새워 활자를 다듬고, 새벽이 오면 첫 인쇄물의 잉크 냄새가 골목을 채우던 순간들. 봄비 뒤 맑은 우물물의 떨림, 제삿상에 오르던 따끈한 밥과 향 냄새, 아이들 웃음과 장정들의 구령이 얽힌 골목의 합창이 되살아납니다. 서늘한 새벽 공기 속에서 책 찍는 소리가 하루의 종소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물관 진열장 앞에 서서 이 책을 마주하실 때, 한 페이지를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보신다면 어떨까요. 활자 사이로 장인들의 손길이, 문장 뒤편으로 동네 사람들의 안부가 들립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고 묻던, 사소하지만 견고한 인사가 하루를 지탱하던 때의 공기가 우리 곁에 돌아옵니다.


4. 한 권의 지리지가 건네는 오늘의 질문


학술적 가치도 분명합니다. 동(洞) 단위 생활의 질감을 전하는 17세기 기록은 흔치 않습니다. 주자동의 사례를 통해 조선의 출판·인쇄 문화, 남산 자락의 공간사, 한양 시민사회를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근현대에 충무로가 인쇄 골목으로 성장한 사실은, '활자의 마을'이라는 이 지역의 오랜 정체성이 시대를 건너 이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한 권의 지리지는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의 다리가 됩니다.


그러나 이 책이 건네는 오늘의 질문은 더 근본적입니다. “당신의 동네는 어떤 마음으로 지켜지고 있나요?” 『훈도방주자동지』는 공동체의 품격이 거창한 사업이나 구호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서로의 상(喪)에 발걸음하고, 혼사에 마음을 보태고, 약한 이를 향해 조용히 손을 내밀던 평범한 실천에서 비롯된다고요.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나 서로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돕고 있는지, 이 책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5. 오늘, 우리에게 남는 문장


결국 『훈도방주자동지』는 '지명이 아닌 사람의 이름과 마음을 기억하는 책'입니다. 낡은 종이 위에 찍힌 활자들은 400년을 건너 우리 손끝에 닿아, 바쁘게 지나치는 오늘의 골목을 다시 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도 우리가 잊고 지낸 선(善)의 습관이 있었다”고.


서울의 어느 저녁, 남산 바람이 불어오는 길모퉁이를 돌 때, 이 책의 한 문장을 마음속에 가져가 보시면 좋겠습니다. 작아도 단단한 동네, 번듯하진 않아도 자랑스러운 삶. 『훈도방주자동지』가 전하는 이 한 문장이, 오늘 우리의 발걸음을 조금 더 천천히, 서로를 향해 걷게 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우리의 동네를 기록할 때, 그 책에도 따뜻한 문장 한 줄이 남기를, 조심스레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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