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을 지킨 두 노인, 안의와 손홍록

by 낭만지리 굴비씨

1. 합격 통지서를 들고 찾아간 곳


2017년 새해가 밝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박물관 학예사 최종 합격 통지서를 받아든 날, 우리 가족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췄습니다. 길고 추웠던 백수 생활의 끝이자, 꿈에 그리던 학예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기쁨도 잠시, 마음 한구석에 숙제처럼 남은 일이 떠올랐습니다. 정식으로 출근하기 전에 꼭 찾아가서 인사를 드려야 할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 합격했습니다. 학예사가 되었답니다. 이제 후배로서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이 말을 전하고 싶어 배낭을 멨습니다. 제가 향한 곳은 서울의 어느 유명한 사찰도, 조상님의 산소도 아니었습니다. 전라북도 정읍, 칠보산 자락에 숨어 있는 작고 초라한 사당, '남천사(南川祠)'였습니다.


2. 남천사, 닫힌 문 앞에서


정읍역에 내리니 겨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택시를 잡아타고 "남천사로 가주세요"라고 했지만, 기사님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칠보면 무성서원 근처라고 설명하고서야 겨우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지역 사람들에게조차 낯선 곳, 그만큼 남천사는 잊힌 공간이었습니다.


남전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아 사방이 어둑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사당. 2년 전 자전거를 타고 왔을 때와 달리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인기척이라곤 옆집 개의 짖는 소리뿐이었습니다. 문틈으로 제실(祭室)이 보였습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차가운 마당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습니다.


이곳에는 두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물재 안의(安義)와 한계 손홍록(孫弘祿). 이름조차 생소한 이 두 노인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통째로 잃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야말로 제가 생각하는 조선 최고의 역사학자이자, 진정한 문화재 지킴이였으니까요.


3. 1592년, 역사가 불타버릴 위기


시계바늘을 1592년 4월로 돌려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습니다. 부산을 뚫은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치고 올라갔습니다. 전쟁의 불길 속에 충주사고, 성주사고, 그리고 한양 춘추관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주 경기전에 보관된 전주사고본 실록 단 한 질뿐이었습니다. 왜군은 호남을 노리고 금산까지 쳐들어왔습니다. 풍전등화의 위기. 만약 전주사고마저 뚫린다면 태조부터 명종까지 200년의 기록은 영원히 사라지게 될 판이었습니다. 관군조차 도망가기 바쁜 그때, 시골 선비 안의(당시 64세)와 손홍록(당시 56세)이 일어섰습니다.

"나라의 역사가 끊어지게 둘 수는 없다!"

두 노인은 가산을 탈탈 털어 수레와 말을 구하고 인부들을 샀습니다. 그리고 실록 800여 권과 태조 어진(초상화)이 담긴 60여 개의 궤짝을 짊어지고 험준한 내장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피난처로 삼은 곳은 내장산 깊은 골짜기의 가파른 절벽 위에 있는 '용굴암(龍窟庵)'이었습니다.


4. 370일의 사투, <수직상체일기>


저는 예전에 자전거 답사를 왔다가 호기심에 통제구역인 용굴암에 올라가 본 적이 있습니다. 60도가 넘는 가파른 철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겨우 닿는 바위 굴이었습니다. 젊은 저도 숨이 턱턱 막히는 그곳을, 예순이 넘은 노인들이 무거운 책 궤짝을 지고 올랐다니 상상이 되질 않았습니다.


두 분은 그 좁고 습한 동굴에서 1년 넘게 머물며 실록을 지켰습니다. 그들이 남긴 <수직상체일기(守直相遞日記)>에는 그 처절했던 당직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안의 174일 당직, 손홍록 단독 143일 당직, 둘이 함께 53일 당직...'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은 알 겁니다. 야간 경계 근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를요. 칠흑 같은 어둠 속, 언제 왜적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두 노인은 서로를 의지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그들이 지킨 것은 종이 뭉치가 아니라, 조선의 혼(魂)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은 실록을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기라 명했습니다. 두 노인은 다시 사재를 털어 실록을 싣고 충남 아산을 거쳐 강화도까지, 그 멀고 험한 피난길을 함께했습니다. 결국 무리한 여정 탓에 안의 선생은 강화도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목숨을 걸고 역사를 지킨 숭고한 순직이었습니다. 손홍록 선생 역시 끝까지 실록을 따라 묘향산까지 갔다고 전해집니다.


5.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지만


다시 2017년의 정읍 남천사. 차가운 마당에 서서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분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야기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도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역사학자인 제가 밥을 벌어먹고 사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분들 덕분입니다. 실록을 그토록 많이 인용하면서 실록 '인용 값'은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이들을 잘 모릅니다. 교과서에 이름 한 줄 나오지 않습니다. 안의 선생의 후손과 손홍록 선생의 후손이 사돈을 맺고,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손화중이 그 후손이라는 사실도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입니다.


남천사의 문은 닫혀 있고, 찾아오는 이는 저뿐이었습니다. 씁쓸함이 밀려왔습니다. "나라도 기억해야지. 나라도 자주 찾아와야지." 그것이 제가 학예사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6. 진도 팽목항에서 다시 묻다


정읍을 떠나 저는 남쪽 끝 진도(珍島)로 향했습니다. 합격의 기쁨을 누리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 한 군데 더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팽목항이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그날 저는 고지도연구학회 간사로 첫 출근을 하던 길이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전원 구조 소식을 듣고 안도했다가, 퇴근길에 마주한 참혹한 뉴스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날 밤, 학회 공지 메일을 쓰면서 첫 문장을 수십 번 썼다 지웠습니다. "안녕하세요"라는 평범한 인사가 그토록 잔인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습니다.


제 어머니가 계신 납골당에는 단원고 학생 두 명의 봉안함이 있습니다. 갈 때마다 그 앞에 놓인 편지와 과자들을 봅니다. 대학에 합격했다는 친구의 편지, 보고 싶다는 엄마의 쪽지... 그 아이들과 저는 아무런 인연이 없지만, 저는 늘 그 앞에서 고개를 숙입니다.


늦은 밤 도착한 팽목항은 적막했습니다. 붉은 등대와 녹슨 십자가, 빛바랜 노란 리본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안의와 손홍록 두 노인이 목숨 걸고 지켜낸 것이 '과거의 기록'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팽목항에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억'일 것입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억울하게 스러져간 생명들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7. 에필로그: 돌아가는 길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세상 모든 여행에서 돌아감은 나아감의 역순이라지만, 그 마음은 갈 때와 올 때가 다릅니다.


빈손으로 시작했지만 가슴 가득 무거운 숙제를 안고 돌아왔습니다. 실록을 지킨 두 노인의 헌신과, 차가운 바다에서 별이 된 아이들의 기억. 과거의 기록을 지키는 학예사로서,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저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박물관 수장고에서 오래된 지도를 펼칠 때마다, 저는 정읍의 닫힌 사당 문과 진도의 붉은 등대를 떠올립니다. 기록되지 않는 역사는 사라지고, 기억되지 않는 비극은 반복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기록과 기억을 지키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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