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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수 Feb 13. 2020

답을 안 하는 것도 답이라는 말

답답하다. 마음이 꽃처럼 시든다

드라마 작가가 되고 나서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어떤 작품을 쓰고 있는지, 괜찮다면 그 작품을 한번 볼 수 있는지 물어온다. 나 역시 내가 쓴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늘 갈망하기에 그럴 때면 가능한 작품을 보내본다.


한창 미니시리즈 습작을 하기 시작했을 때, 한 감독님에게 기획안을 보낸 적이 있다. 그분 역시 나의 작품을 궁금해하셨다. 그런데 기획안을 보낸 지 몇 주가 지나도록 답이 오지 않았다. 하루하루 여러 생각들로 조급함이 늘어갔다. 기다리다 지쳐 먼저 연락을 했다.

결과는 물론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럼 연락이라도 해주지..  혹시나 하고 초조하게 기다리며 허비한 시간이 아까웠다.

상대방은 연락하는 걸 깜빡했다며 미안해했다. 그러나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챌 것이다. 그건 깜빡한 게 아니라, 신경을 안 쓴 거라는 걸.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야심 차게 준비한 단막극 대본을 한 감독님에게 보내고 연락을 기다렸다.

갑자기 뭔 필을 받았는지 글이 정말 방앗간 가래떡 나오듯 쭉쭉 잘도 써졌다. 그렇게 써낸 따끈따끈한 초고였다.

그래서 도통 감이 잘 안 왔다. 이거 나만 재밌는 거 아냐? 왜 연락이 없지? 많이 이상한가? 뒤늦게 불안감이 훅 치고 올라왔다. 초조해서 안절부절못했다.

괜히 형편없는 글 읽느라 감독님 시간만 뺏은 건 아닌지, 근자감에 쩔어 덜컥 초고를 보내버린 게 너무 후회됐다. 좀 더 수정을 해서 보낼 걸. 대본이 너무 허접해 보였다! 어떡해!!!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나를 궁지로 몰았다. 쥐구멍을 찾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아 괜히 보냈어! 이 그지 같은 걸 어쩌자고 보낸 거야! 미쳤나 봐!!

하루 종일 자학하며 감정이 널뛰듯 했다. 머릿속이 온통 아수라장이 될 지경에 이르렀지만 감독님한테선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내가 전화를 해볼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지난번 일이 떠올랐고 나는 바로 마음을 접었다.

전화를 하면 당장은 속이 후련할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분명히 후회할 걸 알기 때문에 체념하고 내려놓았다.

그래, 너무 형편없어서 연락을 줄 가치조차 없는 거야. 그런 게 맞아!

깨끗이 포기했고, 며칠을 끙끙거렸다. 다시 글감이 떠오를 때까지, 다시 한글 문서 창을 열고 글자들을 채워나가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점차 그 일은 나의 기억에서 까마득히 지워져 갔다.


몇 달이 흘렀다. 근데 뜬금없이 그 감독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본 수정은 잘 되고 있어요?"

"네?? (무슨 대본? 수정??)"

"내가 수정하라고 말 안 했나?"

"네?? (멍....)"

"왜, 수정하라고 말했을 텐데..."

대박!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펼쳐졌다.

감독님이 착각을 했던 건지, 아님 거짓말을 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정이란 말은커녕 연락조차 없었던 게 팩트다.

암튼 마치 엊그제 일처럼 감독님은 몇 달 전에 보냈던 대본에 대한 피드백을 해주셨고,

곧바로 나는 그 대본을 수정했다. 그리고 얼마 뒤 방송으로 이어졌다.


작가로 살면서 글을 쓰는 것보다 나를 더 지치고 힘들게 했던 건, 바로 기다리는 일이었다. 기다리는 건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기다리는 것만큼 힘든 게 없다.

해가 뜨고 버스가 오고 첫눈이 오는 건 기다리면 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기다리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들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형태로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때도 있다.


지금도 비슷한 일이 있을 때면 갈등한다.

먼저 연락해볼까? 하고 싶지만, 해도 되지만,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한다.

저마다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올 때 되면 오겠지.. 좀 더 기다려본다.

기다리되, 마음을 비우고, 좀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마치 도 닦는 심정이 되어서.


흔히 말한다. 답을 안 하는 것도 답이라고.

예전에 방송작가 교육원 수업에서 PD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이기도 하다.

근데.. 말은 참 쉬운데... 참 무책임하고 잔인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의 답장을 기다려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그 시간이 얼마나 설레고 긴장되고 두려운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답이 없을 땐 기다림도 끝나지 않는다.

대개는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해서야만 가까스로 끝을 낸다. 마음을 내려놓고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물론 잘 알고 있다. 긍정적인 답을 주고 싶지만 그렇지 못할 때, 연락하는 입장에서 꽤 겸연쩍고 불편할 것이다. 연락을 안 하면 눈치껏 알아서 아닌 걸 알아채겠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근데 알아서 아닌  알아채기까지 거쳐야하는 쓰라린 감정의 회오리를 부디 헤아려주시길..

아니면 아니라는 이 단순한 답장 하나가 모호한 시간 속에 갇혀 스스로를 좀먹고 있을 누군가에겐 얼마나 간절한지, 그 최소한의 존중과 배려를 제발 깜빡하지 말아 주시길..

기대와 다른 말을 듣는  당장은 아플지 모르지만, 답이 없는 것만큼 아픈 말은 세상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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