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무진, 우리의 무진
요즘 Mbti나 다양한 성격유형검사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가 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나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은 쉬운 것일까. 무진기행을 읽으며 나는 한 사람의 나를 찾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숨겨왔던 진정한 ‘나’와 그런 삶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윤희중은 일상생활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의 진심을 숨기며 스스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이 드는 자신의 모습을 모두 무진의 것으로 치부한다. 무진에서는 현실적이지 않은 생각을 하거나, 바람을 피우고,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즉흥적이고 일을 실행할 때 자신의 감정을 따른다.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생각한 바람직하지 않은 나이다. 무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하며 서울에서의 삶을 꿈꾼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윤희중을 무진으로 향하게 하였을까? 이는 자신과의 만남을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김승옥 작가의 다른 소설인 <서울 1964년 겨울>에서도 작가는 익명이라는 요소를 통해 솔직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했다. 그들은 서로의 일상에서 벗어난 만남을 통해 고민 없이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고 솔직해진다. 이처럼 작가는 무진이라는 공간을 핑계 삼아 주인공에게 솔직한 나가 될 기회를 제공한다. 윤희중은 평소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이 되어 무진에서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무진에서의 나’로 구분한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나눈 것은 무진에서의 나를 자신의 모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무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떠나길 바란다. 더 좋은 곳, 신식인 곳을 향해 이상을 꿈꾼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진은 삶의 공간, 즉 현실이다. 하지만 윤희중은 그렇지 않다. 그에게 무진은 이상은 아니지만 추상적인 정의 내릴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난 공간이다. 따라서 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희중이 느끼는 괴리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괴리감은 그가 솔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너무 다른 그들과 나눈 대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솔직한 나를 보여준다.
나는 그의 이러한 모습 속에서 인간이 현실이 아닌 공간에 놓여있을 때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가장 흔한 경험으로, 우리 사회 속에서 익명이란 공간은 우리에게 많은 기회를 준다. 타인이 나를 알지 못하기에, 또한 나도 타인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로움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의 무진이 된다.
나는 변한 그의 모습을 보며 저것이 ‘진정한 나’라면 인간이란 정말 잔인한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의 삶과 전혀 다른 나의 모습,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서슴지 않고 잔인함을 드러내는 모습. 확실히 ‘솔직한 나’는 꼭 도덕적이거나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모습이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라면 그러한 것은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진을 벗어나는 그의 행동을 보고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가 무진을 벗어나며 느낀 감정을 살펴보며 ‘솔직한 나’를 경험하고 그에 따라 살아보았을 때 비로소 자신의 모든 모습을 가진 ‘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현실 속 살아가는 나와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모두 자신이라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진에서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보며 현실을 위해 솔직한 마음을 포기하고 있음을 느낄 때 그는 ‘무진에서의 나’를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자아 일치의 순간이 진정한 나를 이끄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어느 하나의 모습이 우리를 결정짓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희중의 현실 혹은 무진 속 모습 하나가 진정한 그라고 생각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의 두 모습이 하나가 되어 마지막에 그가 느낀 부끄러움처럼 나 역시도 진정한 내가 되어 모든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