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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굶찮니 Sep 23. 2022

너의 불편함이 불편해!

나는 PC주의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극히 PC적인 행동을 지금까지 하면서도 사회 표면에 드러나고 있는 PC적인 것들에 불편해 하며 글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PC하면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내가 어느 친한 동생으로부터 무지랭이 소리를 들었던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생소한 단어의 울림은 마치 인생 2회차를 시작하라는 계몽적인 울림으로 들리기도 했다. 십수 년을 무교로 산 사람에게 종교 권유를 하라는 듯한 불쾌한 호의.


영어가 주는 울림에는 분명 ‘맞다, 틀리다’의 개념으로써 Correctness를 쓴 것 같았지만 한국어로는 ‘올바름’이라고 하는 데에 나는 골몰히 생각했었다.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하지 말 것. 약자를 보호할 것. 여성을 배려할 것. 다문화 인구가 불과 3%밖에 되지 않았던 때부터도 내 주변에서는 올바른 선을 행동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내코가 석자인 것을 핑계로 그들과 합류하지 못 하고 관망해오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대학교 1학년 때에 ‘Unicef’로고가 박힌 검정 티를 입었을 때 주변으로부터 받았던 시선이 그리도 부담되었던 것이다. 알바로 번 돈의 절반을 모조리 930원짜리 3분 카레에 쏟고 나머지는 간간히 알코올에 투자했던 나는 이것이 바로 어머니께서 매달 몇 원씩 아프리카로 보내는 선행의 결과임을 바로 시인했다. 선배들은 비쩍 마른 내 몸을 보며 ‘네 자신을 구휼하라’고 농담을 건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틀리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틀리다며 ‘화’를 내는 목소리가 높아져만 갔다. 그것도 아주 불같이.


화마가 언저리에 오기 전에 나는 잠시 이국으로 떠나있었다. 태국이라는 나라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성’의 측면에서 상당히 다양한 양상을 용인하는 사회를 구축하고 있었다. ‘아, TV에서 보던 트렌스젠더 쇼의 본고장이 설마 여기였어?’ 거리를 활보하는 누나같은 형들, 형같은 누나들, 3~4개월 정도 지나자, 나는 슬슬 내가 한국 사회에서 도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얼마나 자부심을 가졌었고, 그 모든 것에 대한 논리가 눈앞의 현실에 의해 쉽게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오만했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쉬이 치는 드립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른 바 ‘게이 드립’이었다. 욕설 ‘개X끼’의 어감을 순화시키기 위해 어절을 늘이듯 ‘게이 쉐이끼’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브로맨스가 유추되는 상황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그 음절로 ‘숨겨왔던 나의~’ 구절을 읊기도 했다. 그러나 게이의 존재는 평시에는 개그 요소이나, 정말 눈앞에 맞닥들이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알바를 하면서 게이에게 고백 받았던 적이 두 번 정도 있었다. 불쾌함보다는 ‘당황’이 더 적절했다. 나는 당황했다. 부드럽고 은은하고 젠틀한 그 눈빛은 나말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축복할 수 있다고 나는 자신했다. 홀로, 여자에게는 몇 번이고 차이던 내가 이성에게는 매력이 없고 동성에게는 잘먹히는 그런 타입인가 하며 좌절하기도 했다. 겨우 인생에서 딱 두 번의 경험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남들보다 특별한 경험이 있다고 자부하며 게이에 대한 편견은 없으며 단지, 나와는 엮이지 않으면 그만이다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걸리버는 몇 번의 나라를 거치며 아마 본인이 기존에 겪었던 세계는 단지 우물 안이라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태국은 장난스레 놀리면 놀렸지 서로를 혐오하지 않았다. 자신의 성별이 둘 중에 하나가 아니라고 해서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남자였던 친구들은, 그것이 본인의 길이라면 당당하게 뷰티에 투자했다. 여자였던 친구들은 단정하고 깔끔하게 꾸미며 멋지게 살아갔다. 동성을 좋아한다고 해서 마음을 숨기는 행위는 그냥 내가 여태 봐왔던, 해봤던 연애 감정과 별반 다른 없는 부끄러움에서 오는 숨김이었다. 태국 친구들은 물었다. 한국에서는 성소수자들을 싫어한다면서?


내가 오만함을 인정한 것은 성 문화에 대한 문화충격이 다는 아니었다. 이것 말고도 인종차별적인 것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것들 등 소스는 다양했고, 그것들이 나를 진정한 PC주의자로 만들 ‘뻔’했다. 같은 무렵에 한국에서 벌어지는 그 ‘화마’의 불씨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성소수자를 지지한다면서 성전환자의 입학은 거부당하고, 성전환 커밍아웃한 젊은 군인은 강제 전역을 당하고 꽃다운 청춘에 가버렸다. 그래, 한국에서 성소수자로 살려면 목숨 내놓아야 하지. 나는 예전보다 더욱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는 소리가 많아질수록 비극이 잇달아 일어나는지 의문이었다.


너무 많이 생각하거나, 혹은 생각을 아예 안 하거나. 나는 그냥 싫으면 싫다고 얘기하기로 했다. 충분한 이유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분명 사회적으로 두들겨 맞고 숨지겠지. ‘혐오의 자유’를 말하려는가? 아니다. 그냥 가장 기초적인 ‘표현의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 태국에 있는 내 친구들은 그랬으니까.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으니까. 불편함을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불편함을 조장하는 자들을 혐오하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무지랭이인 나로써는 당신의 불편함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혐오라는 아주 센 워딩으로 먼저 깃발을 가져갔다고 해서 당신들이 ‘자유혐오면허증’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도덕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을 추구하는가? 석가모니, 예수를 비롯한 성인들, 데카르트, 니체, 소크라테스조차도 100%성공했다고 보긴 힘드니 아무쪼록 파이팅이다.


혹은 감성적으로 그렇게도 이해를 못 해주겠냐고들 말한다. 감성적이라면 더욱이 혐오에 더 노출되기 마련이고, 최대한 흘려야 맞다. 영화 ‘우리들’에서는 선이와 지아의 관계를 중심으로 아이들끼리 오해가 쌓이고 다툼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잇다른 폭로와 편가르기,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급기야 치고 박고 싸우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선이는 동생이 늘 같이 놀던 친구에게 ‘또’ 맞고 오자 맞으면 또 때리고, 또 때려야 한다고 타이르자. 동생이 명언을 남긴다. “그러면 언제 놀아? 나는 놀고 싶은데.”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 이 도덕적 잣대를 하나 만들기 위해 수많은 철학자들이 평생을 바치다 저서 몇 개씩들 남기고 하늘의 별이 되었다. 집단 지성은 민주주의적인 해결책을 내릴 때는 합리적으로 보이게끔 꾸밀 수는 있지만 무언가 명제를 도출하거나 도덕적 선에 가까운 것을 만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가장 잔인하고도 무서운 것이다. 중세시대, 있지도 않은 마녀들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죽어갔다. 진지하게 철학적으로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우리는 진실로 놀 시간이 부족하고, 일할 시간이 부족하고, 사랑할 시간이 부족하고, 살아갈 시간이 부족하다.


까놓고 말해서 ‘싫어함, 혐오’를 강요하지는 말아야겠다.

“나는 싫다. 하지만 네가 좋아한다고 한다면 그것도 그런 측면에서는 이해할 수 있어.

내가 싫다고 해서 너도 생각이라는 것을 좀 가지고 싫어해야 올바른 것이야.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네가 꼰대 부장님이라고 생각하는 그 양반이랑 뭐가 다른데?

이런 불편함에 네가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정말 유감이다만, 나는 네가 매사에 불편해하는 것이 정말 불편하기도 해.”


어릴 때는 그놈의 착한아이 콤플렉스 덕에 취사 선택 못하는 소위 ‘찐따’였는데,

이제는 그놈의 사회가 나를 올바른 ‘찐따’로 만드려는 모양이다. 어느 샌가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마스크를 이미 장착한 ‘불편한’ 그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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