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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굶찮니 Sep 23. 2022

계절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면 나이 먹은 것이다

만들어지는 유사 꼰대

5월인데, 춥다. 
장맛비 같은 것이 억수로 떨어지고 나서 느껴지는 공기의 한산함이 아니다. 그냥 춥다.
기후 변화니 뭐니 얘기는 들었지만 그거 나만 한 거 아니다. 그냥 이건 봄이 아니라는 생각만 주구장창 들고.
날씨가 기대했던 그런 것이 아니라면 옛 시절 이맘때를 곱씹는다. "하 씨, 분명 어릴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혼잣말처럼 낮게 읊조리는 친구의 말을 듣고는 문득 "늙었구나."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너도 새꺄."라는 말을 듣고는 나 역시 낮게 육두문자를 날렸다. 

'나 때는', '라떼는', 이건 얼마든지 뽑았었고, 그것은 요즘 미덕이 아니라는 말을 들으며 잔뜩 움츠린 30대의 초반을 지내는 가운데 꼰대 소리 안 듣기는 참으로 쉽고도 어렵다. 입을 다물면 착한 아저씨이고, 입을 여는 순간 발언 하나하나가 지적 대상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심지어는 나에게 항상 관대할 것 같은 친한 친구조차 그런다. 요즘 그런 말 하면 큰일 나. 미국의 어디 주에 있었던 '시민에 의한 체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구 독일의 '게슈타포'가 무리 중에 낀 것도 아니거니와, 뭔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재미있는 시대. 

대화의 주제에서, 말을 걸기 가장 무난하면서도 교과서적인 주제가 '날씨'이건만 계절 얘기를 꺼내는 것부터 이 모양이면 거의 꼰대 판독기에 스스로 걸려준 꼴이 되어버린다. 사람은 늘 '비교'하고 싶어 하니까. 비교는 어떤 대상의 위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심리이다. 사람은 언제나 불확실한 것을 무서워하니까. 나는 당장에 5월인데도 날씨가 왜 이렇게 추운지 의문을 제기했을 뿐인데, '요즘 날씨가 예전 같지 않다.'라는 말 한마디에 청자와의 나이차를 가늠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세대의 차이로 대화 공감대의 공백을 스스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그냥 이 세계가 나에게 준 충격에 대해 구시렁거렸을 뿐이다. 

마치 그때처럼. 나는 군대에서 주말에 나가는 종교행사 차량 창문에서 본 '5월의 골짜기 눈'을 아직도 기억한다. 옷도 이미 춘추복으로 입었는데, 햇볕이 닿지 않는 저 강원도 산골짜기에는 허연 눈이 길쭉이 쌓여 있었다. 문화충격이었다. 밖에 자유로운 내 친구들은 봄이라고 꽃구경을 간다던데. 나는 아직도 그 겨울 내내 괴롭혔던 눈이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는 것'을 5월까지 지켜봐야만 하는가. 아니 이게 애초에 가능한가?

눈에 들어오는 시각 정보가 상식과 맞아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보통 '신기하다' 등으로 표현한다. 뭐... 더 상식 밖의 광경이 들어오면 정신이 깨져버리기도 하겠다. 그렇게 정신이 깨져버리기 전에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뭐라고 말을 하는 것이 무의식적인 자기 방어일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경기의 슈퍼 플레이를 보고 '개쩔어!'라고 표현한다든지, 잔인한 범죄를 목도한 뒤 비명을 지른다든지. 규명하고, 규명이 안 되면 경험해 본 아카이브에서 하나씩 대조해보고, 그 대조가 늦어지면 일단 비명을 질러보고, 우리는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시스템이 뇌에 탑재되어 있나 보다. 

내가 꼰대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다면, 내가 어떤 행동과 말을 하는 것이 나이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님을 매분 매 초마다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냥 나도 아팠고, 추워서 그랬다. 나이 들어서 모든 것이 다 괜찮은 것은 아니니까. 평소에 무표정하게 있다고 해서 충격이 다 흡수되는 완충재로 만들어진 인간은 아니다. 그래서 추운 것은 그냥 추운 것이고, 그냥 그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경험했던 모든 매해의 '봄의 기억'을 들추어 비교해봤을 뿐이다. 나는 '의도'가 없다. 나도 그냥 맞았을 뿐이다. 

불과 5년 정도 전만 해도 나이 드립은 자학개그로도 꽤 괜찮은 소재였다. 요즘은 왕따 당하기 좋은 소재가 될지도 모른다. '뭐야, 나이가 얼마나 차이 난다고 라떼시전이야?' 어쩔티비 저쩔티비를 겁나 역으로 박아버리고 싶지만 30대의 세포는 무모함을 피하기 위해 '겁'호르몬을 겁나 많이 분비하는 나이인 듯하다. 그래도 요즘은 '저의 경우는'이라고 말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옛날에는요, 저때는요', 안 쓴다. 무서워서. 

나도 착각했던 사실이었는데, 꼰대는 나이 비례가 아니라 '순번대 비례'이다. 흔히 '짬순, 기수'라고 불리는 세대 순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뭔가 기강을 잡아야 할 것 같고, 그런 소규모 사회는 학교고 대학교고 회사고 모든 곳에 있고. 나도 그런 분위기에 20대 초중반을 살아왔던 것 같다. 내가 그 중심에 들어가 있으면 내가 이 결속을 잇는 수문장 같은 느낌이 되고, 좋은 선배가 되어야지라는 생각과 지킬 것은 지켜야지라는 어이없고 모순된 사명감을 거북왕 대포마냥 무겁게 지고 사는 것이다. 

학교를 나오고, 바다를 나오니 느낀다. 사명감은 생존을 위한 것에 쓰게 되어 있다. 울타리가 참 좁았구나. 그 기수의 틀에서는 그 '룰'과 분위기를 사수하면 모든 게 보장될 것만 같은 내 세상이었지만, 밖은 그저 춥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난 깨달았다. 아, 진성 꼰대라는 것은 옛 시절 세계로 돌아가고픈 자들이구나. 나는 이제야 비로소 별로 돌아가고픈 마음조차 기억이 안 나는 고개를 넘어버렸다. 밖은 정신이 없지만 꼰대 발언을 할 여유조차 없는 세상이니까. 가끔 그렇게 말이 튀어나오고, 내가 꼰대로 양산이 되어버린다면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겠다. 나는 또 그때마다 거대한 틀에 맞춰 이 악물고 속으로만 '춥다'라고 중얼거리고 의연한 표정만 유지 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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