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2020년 시작은 새 직장에서
- 강릉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3부)
“중현 씨 인문 분야 서가부터 반품 솎아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책방 근무 3일째. 나는 지금 서가에서 책을 정리 중이다. 강릉으로 오면서 근무한 안목 카페 산토리니는 작년 말을 끝으로 그만뒀다. 대신 새해 둘째 날부터 시내 서점으로 일터를 옮겼는데,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오래전부터 그린 꿈의 직장이었다. 출근 첫날 아침. 매장으로 들어서면서 동료 직원들에게 인사했다. 다들 친절히 맞이해 주셨다. 직원은 7명이었는데, 4층 건물을 통째로 운영하는 서점치고는 인원이 적어 보였다. 아무래도 새로 생긴 서점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앞으로 점점 더 커지겠지.
매장 안은 서가에 꽂힌 도서 외에도 편히 쉴 수 있도록 카페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서점, 카페, 빵집, 문구 등 다양한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 꾸며진 북카페였다. 규모도 상당했다. 지하 1층부터 4층까지 무려 건물을 통째로 사용했다. 지하 1층부터 2층까지 서가 겸 카페 공간, 3층은 기획 공간 그리고 4층으로 집무실로 말이다. 도서 담당으로 입사한 나는 처음에 반품 작업을 배웠다. 이 일은 매장에 쌓인 도서를 빼 내 적정 재고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주로 오랜 시간 서가에 방치되거나 안 팔리는 책부터 꺼냈다. 매입과 반품 수량을 적절히 조절하는 일은 중대형 서점에서는 필수 작업이었다. 다행히 15년 전 영풍문고에서 아르바이트로 반품 일을 도맡았었다. 덕분에 출근 첫날, 긴장감을 덜어내며 일을 진행했다.
동료 직원의 말에 따라 한 권 한 권 책을 솎았다. 반품 기준은 딱히 없었다. 오로지 직원의 작업 방식에 따라 반품 일지 아닐지가 정해졌다. 서가를 주욱 훑어보는데 왜인지 오래돼 보이는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인쇄 글자의 폰트에서 옛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디자인이 유행을 지나서 그랬을까? 아무튼 그 책이 나를 멈춰 세웠다. '스윽' 책을 꺼내 출판연도를 확인했다. 2007년 4월 15일. ‘오호 2007년에 출간했구나? 누군가 펼친 흔적도 없이 깨끗한 걸 보니 거의 안 나간 모양이야. 그래 아쉽지만 이 책은 빼도 되겠어.’ 탁, 책을 덮은 다음 그대로 왼쪽의 카트 위에 책 올려놓았다. 반품 칸에 실린 모습을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려 다시 서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묵묵히 책을 선별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한 권씩 고민하며 빼내는데, 저 앞에서 역사 코너를 정리하는 동료 직원 손에 익숙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앗,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잖아?! 그거 엄청 재밌는 책인데!!! 아냐, 안돼!! 그 책은 반품하면 안 되는데!!’ 10년 전 일본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무척이나 재밌게 읽은 책이었다. 내용도 그림도 알차서 세계사에 대한 입문서로 딱이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준 덕분에 4~5 차례나 정도였다. 그 때문인지 애정도 남달랐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서가에서 책을 빼내는 동료 직원을 보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사람마다 반품하는 기준이 달라 뭐라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옆에서 안타깝게 바라 볼뿐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우다 도모코 씨가 쓴 <오키나와에서 헌책방을 열었습니다>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도서관 사서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였는데, ‘유능한 사서가 되기 위한 비결은 도서명과 목차 이외에 안 읽는 것이다. 내용까지 파고들면 실격’ 같은 식의 내용인 걸로 기억한다. 책을 다 읽음으로써 어느 한 책에 대해 애정이라든지 개인적 사견을 방지하고, 전체적으로 보는 시야를 갖기 위해서 라고 했다. 책방지기 또한 도서관 사서처럼 사람들에게 책을 소개하는 사람이니, 그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좋아하는 책이 반품으로 빠지는 모습을 보니 가슴 아프지만, 한편으로는 책에 대해 개인적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감했다. '그래. 난 이제 책방지기이니까.' 스스로를 달래며 몸을 돌려 반품 작업을 이어갔다.
반품 외에도 도서 주문, 책 수령, 월간 기획, 책 홍보 등 다른 일도 차곡차곡 배워나갔다. 전부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어찌나 재밌던지 하루하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흘렀다. 힘든 것도 잊은 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만큼 책을 다루는 일이 즐거웠나 보다. 15년 전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꿈꾸던 광경 그대로였다.
오늘은 주문한 도서가 200여 권 가까이 들어왔다. 전날 내가 주문한 책이다. 반품으로 빠진 매대 공간을 전부 신간 도서로 채워야 한다. 도서 담당 직원이 바뀌는 동안 신간을 들이지 못했다 하니, 당분간 이 정도 수량으로 도서를 주문해야 한다. 그 정도쯤이야 문제없었다. 오히려 지금의 난 더 많이 더 많이 주문하고 싶은걸 가까스로 참고 있으니까 말이다.
15년 전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경험한 곳이 서점이었다. 그리고 일본어 공부 겸 취미로 일본 원서로 된 만화책을 번역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이도 차고 경력도 쌓인 지금은 한 서점의 책방지기로, 퇴근하면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15년의 시간을 거쳐 돌고 돌아, 다시 어릴 적 좋아하는 일터로 돌아왔다. 그런 걸 보며 역시 사람 일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 한 구석에 만족감과 번민 둘을 동시에 안은 채, 서가 정리를 다시 시작해 본다. '어느 매대부터 정리해 볼까?! 그래 경제 경영 도서가 많이 들어왔으니, 그쪽부터 해치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