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바와 나 사이
당신은 지금 무언가에 당신의 삶을 기대고 있나요?
혹시라도 없어지면 어떡하지 전전긍긍하고 있는 존재가 있나요?
그건 혹시 사람인가요? 돈이나 명성인가요? 그도 아닌 다른 것인가요?
만약 그것들이 한순간에 없어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발레를 하다 보면 항상 듣는 말이 있다. 발레'바'에 너무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달려가며 점프를 하며 다리를 180도로 찢어 천장으로 턱턱 쳐올리는 아름다운 발레리나들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유연하다'라고 말한다. 나 역시 발레를 하지 않았을 때는 유연한 사람은 발레를 무조건 잘할 거라 생각했다. 발레리나들은 매일 다리 찢기 연습만 하는 줄 알았다. 크나큰 착각이었다. 쉽게 말해 문어가 발레를 한다고 생각해 보라. 흐느적거리는 춤이 막춤이라면 몰라도,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발레로 보일까?
발레를 고작 6개월 배운 나지만, 이제는 근력과 유연성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아름다운 동작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다. 발레수업은 보통 매트에서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을 수행하는 워밍업, 발레바를 잡고 기초 동작 및 순서를 진행하는 바워크, 그리고 바 없이 달려가고 점프하는 동작, 즉 ‘진짜’ 발레와 유사한 동작을 배우는 스탠딩으로 나뉜다. 내가 다니는 학원 비기너 클래스의 경우 80분의 수업 중 앞 뒤 워밍업 및 스탠딩 수업 각각 20분을 제외하면 바(Bar)와 함께하는 바워크 클래스가 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그만큼 바는 발레와 떼라면 뗄 수 없는 존재이다.
초보 '취발러(취미로 발레 하는 사람)'인 나는 고관절부터 발끝까지 다리를 바깥쪽으로 돌리는 턴아웃(Turn Out) 자세를 취한, 아니 정확히 말하면 흉내 낸 상태에서는 바 없이 그냥 서있는 것도 힘들다. 그 상태에서 머리부터 골반까지 몸을 꼿꼿하게 정렬한 스퀘어 박스(Square Box) 자세를 취하고, 오직 무릎만을 굽혀 흔들림 없이 내려가는 플리에(Plie) 포즈를 하다 보면 어떻게 될까? 근력이 딸리는 40살 아줌마는 어느덧 지친 나머지 숨 쉬는 것도 잊을 지경에 이른다.
그러면 선생님은 얼른 귀신같이 알고 말씀하신다. "호흡하세요!"
나와 같이 아직은 근력도, 유연성도 형편없는 수준인 대부분의 초보들은 물에 빠졌을 때 구명조끼에 매달리듯 발레바를 의지하게 된다.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존 수영 때 물 위에 그냥 둥둥 뜨는 법을 배우듯이, 오히려 몸에 힘을 빼고 바를 가볍게 잡는 것이 동작을 수행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 댈수록 물에 깊숙이 빠지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그러나 초보가 발레바를 앞에 두고 초연하기란 쉽지 않다. 보통 기다란 발레바 하나에 두 명의 수강생이 배치되어 수업을 듣는데, 가끔 내 옆 사람이 무리하게 기대어 힘을 줄 때는 발레바의 진동이 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발레바가 워낙 무겁게 만들어져 다행이지 조금만 가벼웠어도 힘을 강하게 줄 때 반대편 상대가 시소를 탄 것처럼 튕겨나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바위투성이 산을 등반할 때 로프나 스틱에 몸을 의지하는 등산객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등산의 경우 나이와 체력치에 구애받지 않는 안전한 등산을 위해 로프와 스틱은 꼭 필요하다. 웬만큼 고수인 등산객들도 산에 오를 때는 스틱을 가져간다. 험한 산일수록 더 그렇다. 등산과 발레가 다른 점이 있다면, 발레는 아무리 초보라도 처음 연습할 때부터 절대로 그것에 온전히 기대어서는 안 된다는 ‘룰’이 있다는 것이다.
발레바와 나 사이에는 늘 종이 한 장만큼의 간격이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내 동작을 도와주는 도구일 뿐인 '바'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초보 티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누구나 혼자 힘으로 플로어에 꼿꼿이 서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가진다. 아무리 허둥거려도, 순서를 까먹어 멍하니 서 있더라도, 중심을 못 잡아 넘어지는 민망함을 겪더라도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결국엔 혼자 서야 한다.
그동안 나를 지탱해 주던 발레바뿐만 아니라 직업, 친구, 가족, 취미, 돈, 나의 삶을 지탱해 준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플로어에 서 있을 때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것들은 그저 그동안 내가 걸치고 있었던 겉껍질일 뿐, 춤을 출 때면 나와 나의 육체만이 함께 오롯이 존재한다. 나는 온전히 혼자다. 그래서 자유롭다.
이것이 내가 발레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