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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분수 Jan 14. 2022

공항 가는 길

지나간 시간, 사라진 능력

지난 구월, 공항으로 출발하기 삼십 분 전.

부엌 정리를 끝내고 상자 두어 개를 들고 뒤뜰로 뛰어나갔다. 토마토를 따야 했다. 욕심대로 심은 열 그루 정도의 토마토 나무는 순을 제대로 따주지 않아 산만하게 자랐다. 한 십 초 정도 눈을 굴리며 지난봄 말벌에 쏘였던 곳을 살폈다. 말벌보다는 남편이 보살피는 벌들만 눈에 띄어 안심하고 다가갔다.

노란색과 빨간색, 초콜릿색 방울토마토와 크고 붉은 토마토를 두서없이 땄다. 방울토마토는 잘 익은 게 너무 많아서 가지를 건드릴 때마다 후드득 땅에 떨어졌지만, 주워 담지는 못 했다. 마음은 급하고 손은 따라주지 않고 볕은 따가웠다. 가장 맛이 좋은 에어룸 토마토도 몇 개 열렸는데 아직 퍼렇다. 지지대 철사에 모양이 일그러지지 않게 열매의 자세를 살짝 고쳐주고, 햇살을 더 잘 받게 잎을 정리했다. 그 순간 초침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몸을 일으키고 상자 가득 토마토를 안고 부엌으로 돌아왔다. 출발하기로 한 시간이 십여 분 남았다. 그런데 남편이 택시가 안 잡힌다고 하는 게 아닌가. 버스는 고사하고 택시도 거의 없는 동네라서 미리 예약하는 게 상책인데, 우리 둘 다 그러질 못 했다. 리프트 앱에 한 개 있던 대기 차량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단다. 겨우 십여 분 거리에 있는 공항인데, 자가용 없이 가기 너무 어렵다. 이웃집에 부탁할까 했지만 대부분 노인들이라 갑자기 여쭙기 죄송했다. 그때 문자가 왔다.


김치 좀 살 수 있을까요?


대량으로 김치를 사곤 하는 근방에 사는 손님이었다. 문자로만 대화했던 사이라 뜬금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로 전화를 걸었다.

 

김치는 있는데 시간이 없어요. 지금 당장 공항에 가야 하는데, 택시를 못 찾고 있거든요. 혹시 김치 값으로 공항에 데려다줄 수 있어요?


영어로 세련되게 말하지 못하는 내 뻣뻣한 질문에 케이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십분 후 케이트 차에 짐을 실었다. 한국에 갈 때보다 돌아올 때 짐이 더 많곤 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남편이 만든 된장과 맥주, 뒤뜰에서 얻은 꿀 조금과 내가 만든 깔개 등 가져가서 나누고 싶은 게 많았다. 케이트는 누굴 맞이할 준비가 안 된 차 트렁크를 급히 정리했다. 미안해진 나는 김치를 건네면서 물었다.


혹시 토마토 좀 가져가실래요?


아, 우리 뜰에도 토마토가 너무 많이 열려서 못 다 먹고 있어요.



어쩔 수 없지. 결국, 토마토 두 박스는 고양이 돌봐주러 들르실 아주버니 차지다. 토마토를 싫어하는 조카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가 내 눈길은 케이트의 차림새로 갔고, 그제야 내가 뭘 입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색 러닝 팬츠에 목이 늘어난 색 바랜 티셔츠를 입고 희멀건한 단화를 신고 있었다. 다시 케이트의 블라우스와 색색깔 돌로 엮은 목걸이를 보았다. 아무래도 나보다 그녀가 공항 놀이에 적절해 보였다.


공항 가는 길에 케이트가 요가 강사이고, 중남미에서 강연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공항에 도착해 코로나 시대라는 것도 잊고 케이트를 안아버렸다. 너무 고마워서. 체크인을 하고 짐 검사를 마치고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서야 숨을 돌렸다.

초고속으로 흐른 지난 사흘. 남편이 휴가 전 마지막으로 벌통을 살피다가 발등을 쏘였다. 집이 헤집어지면 벌들은 기분 상하기 마련,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성난 벌들을 막긴 역부족이다. 발이 퉁퉁 부은 남편은 우울해했다. 우울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공항과 비행기에서 끈 달린 단정한 신발 대신 크록스를 신어야 한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나 보다. 그리고 나머지 집 정리는 내 몫이었다. 척척 정리하고 씩씩하게 청소하긴 했는데 일은 끝이 없었다. 시간이 되자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온 기분이다.



어떻게 된 걸까? 나라 밖으로 가는 비행기를 처음 탄 뒤로 십여 년 동안은 여행의 모든 순간을 뇌에 새길 듯이 감각세포가 깨어있었다. 출발 전날 짐은 준비되었고, 공항버스에 오른 순간부터 흥분이 온몸을 감쌌다. 그때는 항상 창가 자리를 원했다. 비행기가 낯선 도시에 착륙할 즈음이면 창밖을 샅샅이 훑었고, 하늘에서 본 도시 중 이스탄불이 제일 멋지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무조건 복도 자리다. 원할 때 양해 구할 필요 없이 화장실을 갈 수 있고, 조금이나마 다리를 펼 공간이 있는 자리가 창밖에 있을 낯섦보다 우선이다. 이번에 서울에서 댈러스로 돌아오는 12시간이, 십 년 전 서울에서 쿠알라룸푸르까지 가는 여섯 시간 반보다 더 짧게 느껴지기에 이르렀다. 출발 시간이 닥쳐서야 넘치는 짐을 구겨서 여행 가방 지퍼를 겨우 닫고, 고양이나 가족들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공항버스에 오르는데 익숙해졌다.

 

나이 들수록 집중력과 기억력이 떨어지고 그래서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하던데. 정말 그 때문일까? 순간을 좀 더 길게 붙들지 못하고, 기회를 소중히 다루지 못하고, 낯섦에 무뎌지는 게 나이 들어서 그런 거라면 속상하다. 하지만 그게 세월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에 달린 거라면? 그렇다면 마음과 싸워볼 만하지 않을까?

그만큼 예전의 여행이  좋았다.  많이 기억하려고 했고 마음에 남겼다. 물론 그렇게 머리와 가슴에 새긴 것들도 자주 돌아보지 않으니 해어지고 흐려졌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여행하고 싶다.  많은  흡수할  있던  시절 마음 능력을 소환하면 어떨까, 하는 오늘이.







“칠십팔억 지구인 속에서 내 존재는 너무도 작지만, 나는 하루 세끼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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