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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7 책편지] 경기도 스타일 책읽기?

'독서의 역사'와 '닉 혼비 런던 스타일 책읽기'

by 겨울아이 환

"남방염천(炎天) 찌는 날에 빨지 못한 누비바지 땀이 배고 때가 올라 굴뚝 막은 덕석인가.”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읽었던 유배가사의 한 구절입니다. 불을 땐 굴뚝을 멍석으로 틀어막은 듯한 답답함이 낮에는 여전히 떠오릅니다.


이런 날씨에 괜히 집 밖으로 나서는 게 겁나는 것인지, 이번 주말에도 집에서 가장 시원한 자리를 찾아 책과 함께 웅크리고 있습니다.

저녁이면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 덕에 산책할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그나마 위안입니다.


릴케의 시를 떠올리며,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 들판 위에는 바람을 풀어놓으소서.”라고 생각하며 현관을 나섭니다.

무덥고 바쁜 나날 속에서 누리는 작은 즐거움입니다.


지난주의 편지를 보내고, 잠시 언급했던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를 다시 펼쳤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읽었던 기억에 남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그 책날개에서 보았던 『서재를 떠나보내며』를 구해 함께 읽고 있습니다.

팬데믹 당시 저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된 둘째를 돌보기 위해 육아휴직을 했습니다.

마침 어깨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질병까지 겹쳐, 1년 동안은 아이들 식사를 챙기거나 책을 읽는 일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치료를 위해 시술도 받았지만 별다른 차도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복직 이후에는 시술과 관계없이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반대쪽 어깨가 불편하지만, 이번에는 근육량 부족 탓이라 여겨 운동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 독서가 제게 남겨준 기운은 아직도 작은 불씨처럼 제 안에 있습니다.


4년 전 처음 만난 『독서의 역사』는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새벽녘, 다소 습한 공기 속에서 인센스를 피우고 향을 맡으며 알 듯 말 듯한 문장들을 더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때는 멀게만 느껴졌던 이야기들이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그간의 독서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다시 만난 익숙함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제게 이런 감각을 되짚게 해주는 몇 권의 책들이 있습니다.

『독서의 역사』가 그렇고, 닉 혼비의 『런던 스타일 책 읽기(The Complete Polysyllabic Spree)』도 그런 책입니다.

닉 혼비는 한 달 동안 여러 권의 책을 사들이곤 산 책·읽은 책·읽지 못한 책에 관한 기록을 잡지에 연재했습니다. 그 칼럼을 묶은 이 책을 헌책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이 생생합니다.

나름 독서를 취미라 내세우는 저에게도 그의 목록에는 아는 책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평생 따라잡을 수 없을 듯한 사촌 오빠의 아우라처럼 느껴졌습니다. (읽어보니 허술함과 유머가 섞여 있어 위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읽어 온 책들은 대부분 학창 시절 국어나 문학 교과서에서 가지를 뻗은 작품이나, 시대의 베스트셀러 가운데 청소년이 읽을 만한 책들이었습니다.

대학 시절에도 국문학사(國文學史)라는 큰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국문학을 전공한 제게 책을 고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늘 국문학사였고, 지금도 그 기준이 뇌 한구석에 남아 책을 고르는 습관을 좌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 목록에서 벗어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일본 문학의 역사를 따라가 본다거나, 제가 세운 나름의 도서관(알베르토 망구엘의 표현)을 확장해 가거나, 닉 혼비나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식으로 말이지요.

영국 작가 닉 혼비의 읽기 목록은 영미 문학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의 독서를 따라잡으려 해도 번역된 책이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텍스트의 홍수 시대이니, 그 사이에 더 많은 책이 번역되어 나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지점에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 마음속의 도서관은 내가 쓰는 언어를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제 읽기 방식에는 ‘서울 스타일 책 읽기’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습니다. 사실은 경기도 스타일이겠지만, 닉 혼비의 제목을 농담처럼 흉내 내 보았습니다.

닉 혼비가 만약 제가 산 책이나 읽은 책 목록을 바라본다면 “내가 아는 책이 거의 없구나” 하며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의 목록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한 권을 알아보았듯, 그도 제 목록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한 권만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한강 작가의 소설 정도일까요.

결국 우리의 도서관은 언어와 생활의 반경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각자의 서재는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더 소중하고, 오히려 더 아름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베르토 망구엘은 『서재를 떠나보내며』의 서문에서 모든 서재는 자서전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가 지닌 책 목록이 그가 나의 친구인지 아닌지를 말한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지만, 특정인을 언급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 그 내용은 생략합니다. 하지만 그가 읽고 있는 책을 통해 친구를 찾을 수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어떤 책을 통해 친구와 만나고 계신가요?

알베르토 망구엘의 『서재를 떠나보내며』에 아포리즘으로 새겨진 키케로의 문구를 공유하며 오늘의 편지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즐거움을 함께 나눌 동료가 없는 사람은 온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 심지어 천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해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 키케로, 『우정에 관하여』


다음 주쯤에는 낮에도 지치지 않는 가을이 찾아와 있을까요?

요즘 감기가 유행입니다. 건강히 또 한 주 보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이번 주도 제 편지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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