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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Feb 09. 2020

드래곤나이트의 비밀

드래곤나이트 08

  아이의 얼굴을 본 드래곤은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너 결혼했어?”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


   용사가 화들짝 놀라며 부인했다. 


   “이 아이는 이 왕국의 하나뿐인 후계자이자 전하의 유일한 후손이로다, 고귀한 드래곤이여. 나는 전하의 간곡하기 그지없는 부탁을 받아 이 아이를 여기 데려온 것이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나이는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차려입은 옷은 고급스러워 보였지만 호화롭지는 않았다. 눈망울은 또렷하고 얼굴에는 감추기 힘든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드래곤은 그 두려움의 이유를 뒤늦게 알아차린 후 혀를 차며 주문을 외웠다. 잠시 후 드래곤은 거대한 원래의 몸집 대신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변했다. 


   “우와!”


   아이가 두 눈이 감탄으로 휘둥그레졌다. 용사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뒤로 돌아섰다. 드래곤은 용사를 무시한 채 옷가지를 주워 대충 몸에 걸친 후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아이는 뜻밖에도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잠시 주저하다 뜻밖에도 손을 내밀어 드래곤의 다리를 슬쩍 건드렸다. 손가락 끝이 드래곤에게 닿자마자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손을 거둬들였다. 드래곤이 휘파람처럼 높은 웃음소리를 냈다. 


   “눈속임인 줄 알았니?”


   “진짜 다리네......”


   아이가 진심으로 놀랍다는 듯 말했다. 그런 아이를 보며 드래곤은 미소를 지었다. 워낙 긴 생명 탓에 자손을 보는 일이 드문지라, 드래곤 종족이 어린 존재를 좋아하는 것은 타고난 천성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고서라도 드래곤은 이 꼬마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여기는 왜 왔니?”


   “...... 궁금해서요!”


   아이가 힘찬 대답을 내뱉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아이의 왕성한 호기심 탓에 드래곤이라는 신기한 존재를 너무나 만나고 싶었던 것이라고 드래곤은 대충 이해했다. 마침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대상이 곁에 있었던 것이 아이로서는 행운이었다.   


   “왕의 딸은 아닌 거 같은데?”


   “외손녀로다.”


   아이의 부탁을 받아 드래곤에게 데려온 자가 덥수룩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답했다. 


   “왕께서는 오직 외동딸만 두었는데 이 아이를 낳다 그만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이 아이는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인 것이로다.”


   “그렇단 말이지......”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 아버지는?”


   아이를 배려한 때문인지 그 목소리는 아이가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았다. 용사 역시 그만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도다.”


   “그래?”


   드래곤이 쯧 소리를 냈다. 용사가 잠시 눈치를 보다 큰마음을 먹은 듯 말했다. 


   “신기한 일이로다. 그대처럼 강대한 드래곤이 한낱 인간 왕국의 일에 관심을 보이다니.”


   “나도 호기심이란 것쯤은 있다고.”


   드래곤이 투덜대듯 말한 후 아이에게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은 후 싱긋 웃었다. 


   “반갑구나. 같이 놀아 줄까?” 




   아이는 벼랑 위에 두 시간 정도 머물렀다. 그동안 드래곤은 아이에게 자신의 동굴을 둘러보게 해 주었다. 그리고 내킨 김에 가벼운 마법과 완력을 써서 아이에게 즐거운 경험을 제공했다. 그녀가 아이의 목덜미를 잡고 위쪽으로 힘껏 집어던지자 용사의 낯빛은 순식간에 시퍼렇게 변했다. 하지만 공중에서 내려온 아이는 무서워하는 대신 오히려 다시 한번 더 던져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용감한 아이구나.”


   드래곤은 웃으며 아이를 잡아서는 더욱 힘껏 던져 올렸다. 이번에는 마법까지 슬쩍 곁들인 탓에, 아이가 다시 떨어지기까지는 거의 일 분 가까운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동안 이번에는 새하얗게 창백해지다 못해 아예 시커멓게 질려버린 버린 용사의 얼굴을 곁눈질하며 드래곤은 쿡쿡 웃었다. 


   드래곤은 아이를 자신의 등에 태워 왕궁까지 바래다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녀가 왕궁 한복판의 잔디밭에 우아하게 내려앉는 동안 호위병들은 겁에 질려 법석을 떨었다. 왕이 나이치고는 제법인 속도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러나 겸연쩍은 듯한 용사의 모습과 신이 난 외손녀의 표정을 보고는 사정을 짐작한 듯 바로 꾸벅 절을 했다.


   “고귀하신 드래곤이시여. 제 손녀를 돌보아주신 가없는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뭐, 별 일 아니었어.”


   드래곤이 날개를 슬쩍 뒤로 젖히며 말했다. 


   “애가 착하고 귀엽더라고.” 


   그러고는 왕과 왕손녀를 남겨둔 채 그녀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깻죽지에 용사를 태운 채로.


   드래곤이 다시 벼랑 위 자신의 동굴로 날아가는 동안 용사가 말했다.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노라, 강대한 드래곤이여. 그대가 아이에게 보여준 관용과 배려는 실로 위대한 존재에 어울리는 것이었도다.”


   드래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 번 날갯짓할 시간이 흐른 후 드래곤이 입을 열었다. 


   “딸이 있다는 이야기는 안 했잖아.”


   용사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 아이는......”


   “거짓말 할 생각은 말고.”


   그녀의 평온한 말투에는 분명 위협조가 섞여 있었다. 


   “내가 인간의 혈통을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 설명이나 해 봐, 어찌 된 일인지.” 


   용사의 등허리에 차가운 소름이 돋아났다. 


   원래 드래곤나이트의 맹약은 계약을 맺은 인간이 다른 존재와 정을 통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정을 통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논의가 있어 왔다. 대체로 다수설은 정식으로 이루어진 결혼을 뜻한다고 추측했고, 소수설은 단지 섹스만으로도 맹약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설령 육체적 관계를 맺었더라도 정신적 교감이 없이 단지 쾌락만을 위한 것이라면 허용된다는 중도적인 견해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들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맹약에 따르면 일단 드래곤나이트의 맹약을 맺은 후에 다시 다른 존재와 정을 통한 인간은 목숨을 잃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집행되는 처벌이 아니라, 맹약에 깃든 거역할 수 없는 마법의 힘에 따라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일이었다. 역대의 드래곤나이트 중 엽색에 취향이 있는 자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섹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대개 자신의 목숨보다는 덜 좋아하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수천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드래곤나이트 중 그 누구도 직접 그 조항의 정확한 범위를 직접 확인해 본 적은 없었다.


   용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후 실토했다. 


   “팔 년 전에 있었던 일이로다.”


   “그럼 드래곤나이트의 맹약을 맺기 전의 일이군.”


   드래곤의 말은 어쩐지 아쉽다는 듯 들렸다. 용사가 급히 설명을 계속했다. 


   “그때 나는 정령계를 탈출한 불의 정령왕을 물리치고 왕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냈도다. 돌아오자 나의 명성은 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왕국에 널리 알려져 있어, 음유시인이 나의 영웅담을 노래로 지어 부르고 나의 모험을 담은 책이 시장에서.......”


   “너는 유명해졌고 공주가 너한테 반했다는 거야?”


   드래곤의 요약에 용사는 장광설을 뚝 그쳤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서 결혼했다고?”


   “...... 아니다. 그대에게 말하였듯 나는 결혼한 바가 없다.”


   용사의 한숨은 아까보다 더욱 깊었다. 


   “공주는 본디 대륙 건너에 정혼자가 있었노라. 왕국을 둘러싼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상황은 공주에게 마지못한 정략혼을 강요하였기 때문일지니. 그러나 혼례를 넉 달 앞두었을 때 위대한 용사가 나타나자 공주는 그를 사모하고 흠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게 되었도다. 어느 날 성벽 속의 왕녀는 어느 날 시녀를 시켜 남몰래 서찰을 보내게 하였으니, 그 서찰은 은밀하게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결국 내게까지 도달하게......”


   “편지를 보내 널 침대로 끌어들였단 말이지?”


   드래곤의 목소리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용사는 침을 꿀꺽 삼킨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넌 좋다고 달려갔고?”


   용사는 부정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결국 포기하고 다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드래곤이 재차 캐물었다. 


   “그런데 저 아이를 낳다 죽었다고?”


   “......산욕열로.”


   용사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파혼당하고, 추궁당하고, 결국 눈을 감으면서도 아이의 아버지를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다고 들었다.”


   드래곤은 이번에는 용사의 말을 도중에 끊지 않았다. 그러나 용사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래곤은 더 묻지 않았다. 


   기나긴 침묵의 끝에서 결국 드래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끔씩 데려와도 돼.”


   아빠를 안 닮아서 그런지 귀엽더라고, 드래곤은 그렇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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