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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Feb 11. 2020

드래곤나이트의 산책

드래곤나이트 09

 “드래곤이여.”


  이번에는 고귀하다거나 강대하다거나 등의 수식어가 없었다. 드래곤이 눈썹을 치켜뜨며 돌아보았다. 


  “왜?”


  “이건.......”


   용사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결심하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교육적인 면에서 좋지 아니한 듯하다만.”


   드래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분명했다. 용사는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그러니까 아이에게 다방면에 걸친 폭넓은 경험이 필요하다는 그대의 의견은 충분히 존중하는 바다. 하지만 그러니까 인간이라면, 더군다나 일국의 공주라면 좀 더 안전한 곳에서 경험을 쌓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더군다나.......”


  드래곤이 말을 잘랐다. 


  “지금 엄청 안전한 거 아냐? 자기 침실에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해 보이는데?”


  용사는 격렬하게 분출하는 뜨거운 용암천 옆에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구경하고 있는 아이를 힐긋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좀 더 강한 어조로 말했다. 


  “드래곤이여. 그대는 너무나 강대한 존재이므로 한낱 열기 따위가 그대를 해하지 못함은 나도 알고 있노라. 허나 저 아이는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니, 저러다 혹시라도 용암을 뒤집어쓰기라도 한다면 그 참혹한 결과는.......”


  “거 참, 괜찮다니까 그러네.”


  손가락 여섯 개마다 단검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박힌 거대한 손이 용사의 등을 두드렸다. 나름대로 호의의 표시였지만 워낙에 두드리는 힘이 강했던 탓에 용사는 거칠게 기침을 내뱉었다. 마왕이 말했다. 


  “내가 마왕인 거 잊었어? 이곳에서는 내 명이 없는 한 그 누구도 쟤를 해치지 못해. 설령 머리 위에다 용암을 들이붓더라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다고. 아까 설명해 줬잖아.”


  “무, 물론 설명은 들었다만.......”


  그러나 용사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마왕이 세 개의 팔을 교묘하게 꼬아 팔짱을 끼며 껄껄 웃었다. 

 

  “그런데도 걱정 엄청 많네, 짜식. 누가 보면 네 딸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용사의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지만 용암의 격렬한 열기 탓에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용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시 아이에게 시선을 향했다. 마침 아이는 치맛단을 올리고 신발을 벗은 후 맨발을 쭉 뻗어 용암 안으로 집어넣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용사는 목에 뭐가 걸리기라도 한 듯 격렬하게 기침을 해댔다. 그러나 용암 속에서도 자신의 다리가 멀쩡한 걸 확인한 아이는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용사에게는 일말의 신경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드래곤이 산책을 제안했을 때 용사는 대번에 승낙했다. 그들은 단숨에 왕궁으로 날아가 왕에게서 왕녀를 넘겨받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드래곤이 생각한 산책과 용사가 생각한 산책 사이에는 안타깝게도 사소한 차이가 있었다. 


  드래곤이 한 번 손짓하는 것으로 왕성의 정원 한가운데에 측량할 수 없으리만큼 어둡고 검은 구덩이가 생겨났을 때, 용사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미처 어떻게 행동하기도 전에 드래곤은 양손으로 용사와 아이의 손을 붙잡고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극한의 냉기가, 다음에는 극도의 열기가 바람이 되어 용사의 몸을 거칠게 휘감았다. 용사가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는 지옥의 마왕이 서서 갈라진 혀로 입술 주위를 핥고 있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용사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마왕이 말했다. 


  “오랜만이다. 누님도 오셨소?”


  용사는 끙끙대는 신음소리로 인사를 대신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쓰다듬은 후 옆을 돌아보았다.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를 가리켰다. 


  “인사해. 왕녀야.”


  드래곤이 왕국의 이름을 대자 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거기라면 알고 있소. 지난번에 소랑 돼지를 가져다준 곳이구먼.”


  마왕이 코에서 싯누런 유황 증기를 뿜으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소개하마. 내가 지옥의 마왕이다.” 


  아이는 눈을 두어 끔뻑였다. 그리고 하얀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일곱 살짜리 꼬마 치고는 꽤 그럴듯해 보이는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를 받은 마왕의 입이 턱 밑까지 쩍 하고 갈라지며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용사가 알기로는 기쁨의 표시였다. 물론 알고 있다 해서 쉬이 익숙해지는 건 아니었지만.




  수만에 달하는 악마와 악귀들이 소란을 떨며 길을 열었다. 지옥의 지배자가 직접 다른 사람을 안내하는 건 결코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몇몇 나이 든 악마들만이 까마득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마왕님의 옆에 서 있는 분은 과거에도 안내를 받았던 분이다!”


  “나도 기억이 난다!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아니야!”


  “그런데 옆에 인간은 누구지? 꼬마는 또 누구고?”


  “나 저 인간 알아!”


  누군가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용사를 손가락질했다. 


  “예전에 마왕님과 같이 술을 마시던......”


  그 악마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마왕의 시선을 받자마자 머리가 터져버린 까닭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악마였던 것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가운데, 마왕이 드래곤의 눈치를 보며 비굴하기까지 한 태도로 머리를 긁적였다.


  “누님을 모시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원. 미안하오, 누님.”


  “아니, 뭐 괜찮아.”


  다행히도 드래곤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왕과 용사는 서로를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왕은 두 손가락을 구부려 잔을 마시는 신호를 보냈다. 드래곤이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걸 확인한 후에 감행한 용감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용사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마왕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잠시 후, 마왕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요, 누님. 예전에 여기서 함께 놀던 거 기억나시오?”


  “응. 재미있었지.”


  용암이 들끓는 작열지옥의 풍경을 보며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에서 불길이 일어나고 거칠게 김이 피어나며 용암이 솟구치는 모습은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왕녀가 용사와 드래곤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기서 놀아도 되는 거예요?”


  용사가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지만, 그전에 드래곤이 먼저 대답했다. 


  “물론이지. 야, 안전한 거 맞지?”


  뒤의 말은 마왕에게 향한 질문이었다. 마왕이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지옥 전체에 알려 뒀소. 어떤 일이 있어도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그 말대로였다. 용암에 발을 집어넣고 마그마에 머리를 담가도 아이는 아무렇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심스럽던 아이는 이내 맨발로 작열지옥을 뛰어다니며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드래곤은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용사는 초조하게 손가락 끝을 씹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왜 그렇게 불만이야? 애들은 원래 뛰어놀아야 한다던데.”


  드래곤의 말에 대한 용사의 대답은 흡사 비명에 가까웠다. 


  “저건 노는 게 아니로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모두의 눈에는 즐겁게 뛰노는 모습이었기에 아무도 용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이는 저녁이 되어서야 왕궁으로 돌아왔다. 너무 열심히 놀았던지 다소 지친 기색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 선 용사는 석 달에 걸친 모험을 떠났다 돌아온 것 같아 보였고 퀭한 눈과 늘어진 눈꺼풀은 초췌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왕궁의 시녀들은 용사님이 지옥에서 사투를 벌인 끝에 왕녀님을 구해왔다며 호들갑을 떨다가 시녀장의 호통을 듣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드래곤이 손을 휘저어 지옥으로 내려가는 통로를 닫았다. 아이는 뭔가 아쉬운 듯 땅을 골똘히 내려다보다 조심스레 말했다. 

 

  “다음에 또 함께 산책가도 돼요?”


  절대 안 된다고 용사는 외치려 했다. 그러나 강력한 마법의 힘이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드래곤은 싱긋 웃으며 양손을 아이의 겨드랑이에 넣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아이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대답했다. 


  “물론. 다음엔 빙한지옥에 데려가 줄게. 이 아저씨도 같이 갈 거야.”


  “만세!”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기뻐했다. 그 옆에는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열려 애쓰며 버둥거리는 한 남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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