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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Apr 16. 2021

드래곤나이트의 분노(하편)

드래곤나이트 10

  “다시 한 번 물어보지.”


  드래곤이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은 비록 언어의 형태를 지니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무형의 아이스 브레스에 가까웠다. 주변의 기온이 원래대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도적은 드래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깃든 날카로운 냉기를 느꼈다. 


  “아다만타이트 조각상을 훔치려고 했다고?”


  “그렇습니다.”


  대답하는 도적의 태도는 자못 공손하게 변해 있었다. 말투나 어조는 다소곳하다는 표현조차 어울릴 정도였다. 무릇 생존 의지는 때때로 한 생명체의 태도나 성향을 극적으로 바꿔놓기도 하는 법이라고, 용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거,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네.”


  드래곤은 무척이라는 두 글자에 특별히 힘을 주었다. 


  “내가 그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쟤가 말했을 리는 없을 텐데.”


  날카로운 시선이 용사를 향했다. 용사는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외쳤다.   


  “물론이다, 강대한 드래곤이여! 나는 타인에게 함부로 이야기를 떠벌리는 자가 아니로다!”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기 전에, 도적은 즉시 입을 열었다. 


  “제가 소속된 길드의 장에게 들었습니다. 확실한 정보라고 했습니다.”


  드래곤은 한쪽 눈썹을 치켜뜨더니 길드의 이름을 물었다. 도적은 망설임 없이 즉각 대답했고, 드래곤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눈을 감았다. 용사의 얼굴에 의아해하는 기색이 떠오를 때쯤, 갑작스레 격렬한 마나의 흐름이 대기를 뚫고 치솟아 오르더니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날아갔다. 잠시 후 드래곤이 다시 눈을 뜨면서 짤막하게 내뱉었다. 


  “좋아. 처리했어.”


  “무슨 말씀이신지......?”


  도적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드래곤이 대답했다. 


  “방금 전에 그 길드는 붕괴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봄날의 따스한 햇살 속에서 도적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 말이 거짓이나 허풍이 아니라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딱히 애착이 있는 도적 길드는 아니었고 그저 사업상의 관계를 맺었을 뿐이었지만, 그럴지라도 자신이 속한 조직이 송두리째 소멸한 것은 도적에게 있어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인지 드래곤의 기분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쯤은 개운해진 것도 같았다. 


  “그보다 너 말이야.”


  “예. 말씀하십시오.”


  도적이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세우며 대답했다. 드래곤이 물었다. 


  “이제 어쩔 거야?”


  도적의 그다지 길지 않은 일생에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도적은 한참이나 고민한 끝에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 입 밖으로 내밀었다. 


  “만일 용서해주신다면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는 이곳을 침범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적은 스스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일이 수월하게 풀릴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존재 중 하나의 진노를 샀는데도? 하지만 놀랍게도 드래곤은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그러든지. 여하튼 심심풀이는 되었으니까.”


  도적은 극히 놀랐다. 그러나 하늘의 신들이 내려준 것만 같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대로 날려 보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도적은 즉시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인 후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드래곤의 말이 도적의 발목을 붙들었다. 


  “잠깐. 놓고 갈 거 없어?”


  도적이 그 말뜻을 모를 정도로 미욱하지는 않았다. 도적은 얌전히 지니고 있는 물건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마법의 힘이 깃든 단검 두 자루가 바닥에 놓였고, 품속에 간직한 보석 주머니가 그 옆에 놓였다. 뒤이어 도적은 엘프의 장화를 벗어서 그 곁에 놓았다. 모두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원하는 것, 진귀한 보물과 마법이 깃들어 있는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적은 머리에 쓴 두건을 벗어 신발 옆에 놓았다. 그걸 쓰고 있는 자의 모습을 흐릿하게 하여 남들이 외모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는 마법의 두건이었다. 


  “우와.”


  감탄사의 주인은 왕녀였다. 


  “책에 나오는 왕자님 같아.”


  왕녀의 목소리는 순수했고 휘둥그레진 눈은 도적의 찰랑이는 짧은 금발과 파란 색 눈에 못 박혀 있었다. 뜻밖의 반응에 용사는 다소 당황한 것처럼 보였고, 이상하게도 약간은 화가 난 것처럼도 보였다. 그때 왕녀가 휙 돌아서더니 용사에게 말했다. 


  “용사님. 나 저 사람이랑 결혼하면 안 돼요?”


  용사는 누군가에게 목을 졸린 것처럼 기묘한 목소리를 냈다. 왕녀가 다시 말했다. 


  “재상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저는 언젠가 멋진 왕자님과 결혼할 거라고. 그러니까 저 왕자님하고 결혼할래요.”


  드래곤은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했다. 그녀가 알기로 고작 열 살 밖에 안 된 인간은 결혼하기에 지나치게 어린 나이기 때문이었다. 조혼이라는 풍습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럴지라도 왕녀와 도적의 나이 차이는 인간치고는 다소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일단.......


  그때 용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왕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용사는 입을 열었다.  


  “경애하는 왕녀님.”


  용사가 마치 어린 아기새의 깃털처럼 부드럽게 속삭였다.


  “제가 당장 저놈을 죽여 왕녀님의 명예를 지키겠습니다.”


  “뭔 헛소리래.”


  투덜거림은 드래곤의 몫이었다. 


  “너 명색이 용사잖아?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거 아냐?”


  “이유는 있다, 강대한 드래곤이여.”


  용사가 이를 악물며 한손으로 도적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놈의 존재가 바로 그 이유다.”


  손가락질당한 도적은 그야말로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봐요 아저씨. 도적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립니까. 그런 당황스러운 짓거릴랑 그만두고 우리 이쯤에서 서로 깔끔하게 헤어지자고요. 그렇게 말하고 어서 절벽 아래로 내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도적의 발에는 엘프의 장화가 신겨져 있지 않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만일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용사의 손에 들린 검이 날아들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용사의 반대쪽 손은 이미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이 대륙에서 유일무이한 드래곤나이트이자 마왕군에 맞서 이 나라를 구한 용사의 검격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정도로 도적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적은 말했다. 


  “용사님. 아무래도 왕녀께서 아직 잘 모르실 나이라.......”


  “닥쳐.”


  용사가 으르렁거렸다. 


  “죽기 싫으면 닥쳐.”


  하지만 닥치고 있어도 죽을 거 같다는 확신에, 도적은 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용사님. 제가.......”


  “나는 분명 닥치라고 했다.”


  용사의 목소리가 더욱 낮게 가라앉았다. 그 무형의 박력에 짓눌린 도적은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죽음의 공포가 도적을 짓눌렀다. 사신이 정말로 눈앞까지 당도하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드래곤의 한가로운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잘 몰라서 묻는 건데, 인간은 여자끼리 결혼하기도 하나?”


  용사는 양 눈을 두어 차례 끔뻑였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무형의 기운이 사라짐과 동시에, 용사는 고개를 돌려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무어라 말하였는가, 드래곤이여?”


  “여자끼리도 결혼하느냐고.”


  드래곤이 반복했다. 


  “드래곤들은 그런 경우가 별로 없거든. 아예 없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꽤나 드문 일이라서. 그래서 혹시 인간은 좀 경우가 다른가 싶었지.”


  용사는 눈을 몇 차례 더 끔뻑였다. 그리고 좀 더 멍청하고 얼빠진 얼굴로 도적을 쳐다보았다. 도적은 황급히,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녀가 실망한 듯 말했다. 


  “어머. 왕자님이 아니었나요?”


  “절대 아닙니다.”


  도적이 즉각 대답했다. 


  “직업상 거추장스러워서 머리를 짧게 쳐서 그렇지, 전 여자입니다. 혹시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윗도리 벗고 보여드려요?”


  뒤의 말은 용사를 향한 것이었다. 


  용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힘주어 쥐고 있던 검 손잡이를 슬그머니 놓은 후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헛기침을 몇 차례 하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아, 그 뭐냐, 아니 굳이 꼭 그럴 것까지는 없도다.”


  멍청한 병신자식. 눈깔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거냐? 도적은 속으로 그렇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 바람에 도적은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용사가 저토록 화를 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건 도적에게 더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다소의 소란이 있은 후 도적은 허리춤에 묶은 밧줄에 의지하여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그 동안 용사는 우두커니 선 채 도적이 서 있었던 자리만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잔뜩 실망한 왕녀가 조그만 목소리로 무어라 투덜거렸지만 용사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용사의 모습과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는 얼굴을 보면서, 드래곤은 갑작스레 이유 모를 후회를 느꼈다. 


  ‘......역시 그냥 죽여 버릴 걸 그랬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래곤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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