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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May 24. 2021

은원도검(恩怨刀劍) 1

무협

“무(武)란 사람을 해치는 일이다.”


사부는 으레 그랬듯이 갑작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하더라도, 무공은 결국 사람을 죽이기 위한 수단이다.”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덤덤했다. 


사부는 깊은 눈빛으로 한동안 오른손을 응시했다. 한 갑자가 훌쩍 넘는 동안 무거운 병장기를 쥐고 휘둘러 온 손은 온갖 흉터와 상처로 뒤덮여 본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협(俠)이란 사람을 돕는 일이다.”


사부는 천천히 오른손을 내려놓은 후 이번에는 왼손을 들었다. 방금 전과는 정반대로 희고 상처 하나 없는 손이었다. 손바닥에는 굳은살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손등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윤기마저 돌았다.  


“힘이 있다면, 강자에게 항거하여 약자를 도울 수 있다.”  


나는 침묵했다. 사부가 나를 돌아보았다. 


“네가 배우고 익힌 무공으로 때로는 사람을 해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을 도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잊지 말거라. 무림에 적을 둔 자라면 응당 무와 협 두 자를 반드시 가슴에 새겨야 한다는 것을. 그거면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사부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너라면 이해하리라 믿는다.” 


그것이 그분이 이 세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날 밤, 사부는 잠자듯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봄에 나는 무림의 세계로 발을 내딛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기에.




“내 이름은 정후(鄭垕)라 하오.”


놈이 기다렸지만 내 말은 끝이었다. 놈은 눈썹 한쪽을 꿈틀거렸다. 무림의 불문율을 지키라는 가벼운 재촉이었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사문(師門)은 밝힐 수 없소.”


그건 사부의 명령이었다. 사부는 무림에 나가서도 자신에게 사사하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말라고 했다. 나는 사부의 명령을 어길 생각이 없었다. 


“그런가.”


놈은 짤막하게 한숨을 쉬더니 검을 뽑았다. 청량한 소리와 함께 뽑혀 나온 검날에 아침 햇살이 드리워졌다. 놈의 제자가 잽싸게 다가와 양손으로 검집을 받아든 후 공손히 뒤로 물러났다.   


“허면 내가 스스로 알아내도록 하겠네.”


“쉽지 않을 거요.”


나는 경고한 후 도를 잡은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패기가 마음에 드는군. 내가 장문인이 된 이후로 내게 자네처럼 대범하게 말하는 자는 없었네. 젊은 사람이라면 응당 그런 패기가 있어야 하건만.”


“실력도 마음에 들기를 바라오.”


호기를 부렸지만 절반 이상은 허세였다. 놈이 강적이라는 사실쯤은 자세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날카로운 긴장감이 등허리를 타고 머리까지 솟아올랐다. 언제라도 내 목숨이 달아날 수 있다고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나는 한 차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어차피 이제는 물러설 곳이 없다. 물러설 수도 없다. 이건 단순히 실력을 겨루는 비무(比武)가 아니었다. 상대를 죽이든지 아니면 내가 죽든지, 가능한 결말이 둘 중 하나밖에 없는 결투였다. 그리고 나는 아직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놈의 눈을 응시하며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아버지를 살해한 원한을 갚기 위해, 이제 그대를 죽이겠소.”




“나는 일평생 무림을 주유하면서 수많은 은원을 쌓았다. 어떤 이는 내게 은혜를 입었지만 어떤 이는 내게 원한을 품었다. 은원 하나하나마다 돌 하나씩을 쌓는다면 하늘을 찌를 듯한 돌탑 두 개쯤은 너끈히 만들고도 남을 게다.”


언젠가 사부가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은혜든 원한이든 간에 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네게는 분명 짐이 되겠지. 그러니 향후 무림에 출사하더라도 내 이름은 밝히지 말거라. 이미 네게는 갚아야 할 원한이 있는데, 네가 행하지 않은 은혜와 원한까지 감당해야 한다면 그건 지나치게 불공평한 일 아니겠느냐.” 


“그럼 은혜만 받고 원한에서는 도망치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말했다. 누군가에게는 농담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사부는 쿡쿡 웃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느냐. 똑같은 행동조차도 누군가에게는 은혜고 누군가에게는 원한인 것을.”


사부는 잠시 눈을 감고 과거를 더듬었다. 


“나는 예전에 친구를 살해한 원수를 찾아가 죽인 일이 있다. 그 친구가 예전에 내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이지. 그로써 나는 친구에게 받은 은혜를 갚았고, 친구의 아들은 내게 은혜를 빚졌다. 원수가 친구를 죽인 원한은 사라졌고, 내가 원수를 죽인 원한이 생겨났다. 누군가는 내게 감사해했고, 누군가는 아내는 나를 증오했지. 은원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사부는 다시 눈을 떠서 나를 보았다. 


“알겠느냐?”


“아니요.”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사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지만 알게 될 거다.”




도와 검이 부딪히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손아귀에 와 닿는 충격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강렬했다. 나는 손에 힘을 주며 손목을 돌려 놈의 검날을 비껴냈다. 동시에 세 차례 연달아 도를 내리쳤다. 놈은 날렵하게 몸을 뒤로 날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움직임이 빠르군. 절도가 있고.”


“당신은 여유가 있고 말이지.”


나는 오른발로 땅을 박차며 놈을 따라붙었다. 도를 가로로 휘두르고, 재차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다. 도가 천지를 가를 듯한 기세로 머리를 쪼개기 직전에 놈은 오른쪽으로 재빨리 피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예상 범위 안이었다. 순간적으로 내력을 손목에 집중시키며 나는 외마디 기합을 내뱉었다. 


“흐압!”


허공을 내려치던 대도가 갑작스레 방향을 바꾸더니 오른쪽 위로 날아갔다. 놈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챙!’


놈은 몸을 낮추는 동시에 검을 쳐올려 내 일격을 비껴냈다. 나는 내심 혀를 찼다. 함정을 파고 끌어들였는데 그걸 피해낼 줄이야. 그러나 어차피 이 정도 잔꾀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님은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나는 대뜸 도를 강맹하게 휘두르며 놈을 밀어붙였다. 놈은 그 참격 하나하나를 일일이 받아내며 외쳤다. 


“좋다! 자네는 내 제자들보다 훨씬 뛰어나군!”


그 목소리에 섞여든 순수한 감탄이 신경을 거슬렀다. 나는 빈정거렸다.  


“그대의 가르치는 솜씨가 부족한 탓일 거요.”


“유감스럽게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네.”


놈이 뜻밖에도 인정했다. 


“오늘 나를 따라온 저 아이는 비록 어리지만 내 제자들 중에서 가장 자질이 뛰어나다네. 하지만 내 부족함 때문에 그 자질을 계발시켜 주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해. 앞으로는 좀 더 세심하게 살펴 주어야겠어.”


도와 검이 부딪히면서 잠시 두 사람의 간격이 멀어졌다. 그 사이에 나는 힐긋 놈의 제자를 쳐다보았다. 나보다 몇 살쯤 아래여서 아직 앳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자기 스승과 나와의 대결을 보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대뜸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은 너무나도 명확한 증오였다. 자신의 스승을 죽이려 드는 자에 대한 증오. 


나는 바닥에 침을 뱉은 후 도를 고쳐 쥐었다. 


“나 또한 유감이오. 오늘 이후로는 그럴 기회가 없을 테니까.”





“후야.”


나를 부르는 사부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느리고 묵직했다. 나는 불안감을 느끼며 사부를 돌아보았다. 사부가 그렇게 말할 만한 일은 내가 아는 한 단 하나밖에 없었다. 


사부의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예상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네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전갈이 왔다.”


어떻게 석호산까지 돌아갔는지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돌아간 이후로도 그저 단편적인 기억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단편 하나하나는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나의 머릿속에 박혀 있다. 어린 내가 삼촌으로 부르던 산채 아저씨들의 시체들. 강력한 내공이 가미된 일격에 산산조각으로 박살나 버린 병장기. 그리고 목이 없는 아버지의 남은 시신. 


“다 죽었다. 병신인 나만 혼자 살아남았어.”


곽 아저씨가 주저앉은 채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한참이나 갈아입지 않은 게 분명한 옷은 피와 땀으로 절여져 있었고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놈은 한낮에 산채를 덮쳤다. 놈은 혼자였고 산채의 인원은 도합 아홉이었다. 그러나 숫자는 중요치 않았다. 놈은 스친 상처 하나조차 입지 않은 채 순식간에 산채를 제압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기에 그 과정에서 다섯이 죽었고 아버지를 포함한 셋이 사로잡혔다. 


얄궂게도 곽 아저씨만이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마침 산중턱에 올라가 덫을 점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오른팔을 잃은 이후로 곽 아저씨는 산채의 식량을 담당하고 있었다. 덫에 걸린 토끼의 목을 비튼 후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산비탈을 내려왔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후였다. 아저씨는 바위 뒤에 숨어서 산채 안의 동태를 살폈다. 


“아마 우리에게 원한을 품은 것 같았어.”


곽 아저씨가 띄엄띄엄 말했다. 


“두목에게 뭐라 심문을 하는 것 같았어. 나는 멀리 숨어 있어서 뭐라 하는지는 못 들었는데, 고작 몇 마디 만에 바로 검을 들어 두목과 나머지 친구들을.......”


곽 아저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매장하기 전에 나는 아버지의 시신을 살폈다. 목의 상처는 깨끗했다. 무공에 능한 자가 일격으로 베어낸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와 삼촌을 합쳐 모두 여덟 묘의 무덤을 만들면서 나는 맹세했다. 이 원한을 반드시 갚고야 말 것이라고. 


그날 밤, 홀로 남은 곽 아저씨는 목을 매달았다. 다음날 무덤의 수는 아홉으로 늘어났다. 내 원한의 무게도 그만큼 더 늘어났다.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내게 사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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