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인물들 35
유복은 자가 원영(元潁)이고 서주 패국 상현 사람입니다. 전란을 피해 양주로 갔다고 하는데 아마도 조조가 도겸과 격돌하던 시기에 이주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양주도 평화로운 곳은 아니었지요. 서주와 인접한 양주 일대는 원술의 세력권 안에 있었고 원술 역시도 조조의 적수였으니 말입니다. 당시 서주와 양주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주인이 연달아 바뀌는 극심한 혼란기였고,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유복 또한 자신이 어느 쪽에 서야 할지 입장을 정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선택은 조조였습니다.
건안 초엽, 196년 무렵에 조조는 황제를 영접하여 허도로 천도합니다. 도겸이 죽은 후 사사로이 서주목 자리를 넘겨받은 유비의 지위를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편으로 삼고, 원술 및 유표 등과는 대립각을 세웠지요. 그 시기를 전후하여 유복은 조조에게 귀부합니다. 그런데 덜렁 혼자만 간 게 아닙니다. 원술 휘하에 있었던 장수 둘을 설득해서 그 무리와 함께 귀부했지요.
조조는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 당시 조조는 비록 천자를 모시고 있었지만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고 친구는 적었기에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거든요. 그런 처지에서 적의 세력을 자기편으로 삼을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었습니다. 조조는 유복을 치하하고 관리로 삼았습니다.
이후 역사서에 다시 유복의 이름이 등장하는 건 대략 4,5년 후의 일입니다. 원술이 죽고 양주 일대에 힘의 공백이 생기자 크고 작은 세력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했습니다. 개중에도 유력한 호족인 주유와 손잡고 강동 일대를 평정하고 다닌 손책의 세력이 상당했지요. 손책은 이술이라는 자를 사사로이 여강태수로 임명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후 양주자사 엄상을 공격하도록 하여 죽입니다. 국가에서 임명한 양주의 총책임자가 피살당할 정도였으니 당시 양주의 상황이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는지 알 법하지 않습니까. 이후 매건(혹은 매성), 뇌서, 진란 등이 여강에서 수만 명이나 되는 무리를 규합하고 일어나는 등 양주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였습니다.
이때가 200년입니다. 조조는 관도에서 자신의 존망을 걸고 원소와 대치하고 있었던 바로 그 시기지요.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양주 일대가 소란스러우니 조조는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을 겁니다. 하지만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자신보다 훨씬 강성한 원소와 맞서기 위해, 조조는 동원가능한 모든 병력과 물자를 북쪽에 집결시키고 있었거든요.
여기서 조조는 유복을 호출합니다. 그를 양주자사로 삼아 동남쪽의 일을 책임지도록 했지요. 병사 한 명도 딸려 보내지 않고 말입니다. 유복이 받은 것이라고는 양주자사 지위를 상징하는 인수(印綬)와 말 한 필뿐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명령입니다. 당장 전임자가 반적들에게 공격받아 죽은 자리에 부임하라니요. 더군다나 병력을 잔뜩 내어줘도 시원찮을 판에 혼자 몸으로 가라는 건 네가 죽을 곳으로 찾아가라는 말이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하지만 유복은 두말 않고 명을 받아들입니다. 홀로 말을 타고 동남쪽으로 향했지요. 물론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양주 한가운데로 들어가지는 건 자살행위였고, 조조도 그걸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유복이 간 곳은 양주 북부의 요지인 합비였습니다. 당시 여러 세력의 각축 속에서 백성들이 도륙당하거나 혹은 도망친 바람에 합비성은 텅 비어 있었는데, 유복은 그곳을 양주를 다스리는 치소로 삼은 후 뇌서 등 지역의 세력가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리하여 뇌서 등은 오히려 황제(를 모시고 있는 조조)에게 공물을 바치게 되었지요.
이렇게 말하니 엄청나게 손쉬운 일처럼 여겨질 법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유복의 처지는 그야말로 시궁창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인근에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거느린 세력들이 즐비했지만 유복에게는 아무런 무력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조정의 임명을 받은 자사라는 지위조차도 생존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비정한 현실은 이미 전임자가 자신의 목숨으로 증명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유복은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뇌서와 진란 등을 설득하여 조조의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최소한 적대시하지는 않도록 했으니, 그야말로 수만 군사의 힘이 필요한 성과를 홀로 이루어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후 유복은 양주 북부 일대를 평온하게 하기 위해 목민관으로서의 역할에 진력했습니다. 성을 수리하고 고향을 떠난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였고, 크고 작은 제방을 여럿 쌓아 백성들이 홍수나 가뭄의 피해를 입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유학자들을 모아 학교를 세우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도 방비 또한 결코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둔전을 확대하여 군사의 수를 점점 더 늘렸고, 성벽을 높이고 보루를 만들었으며, 방어전을 위해 필요한 나무, 바위, 풀, 기름 등을 엄청나게 저축했습니다.
그 결과 한때 텅 빈 성이었던 합비는 양주의 중심지이자 요새 중의 요새로 거듭나게 되었지요. 조조가 관도 대전에서 승리한 후로도 북방을 평정하기 위해 연달아 전쟁을 치던 몇 년간, 동남방을 걱정하지 않고 오직 눈앞의 전쟁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유복의 존재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유복은 10년 가까이 합비에 있다가 208년에 사망합니다. 이후 벌어진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손권이 내친 김에 합비까지 공격하지만, 합비의 군민들은 일치단결하여 손권의 공격을 버텨냈습니다. 바로 유복이 비축해 두었던 군수물자들을 사용해서 말입니다. 마침내 손권이 물러간 후, 양주 일대의 관원과 백성들은 그를 진심으로 추모했다고 합니다.
유복은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대단한 인물입니다. 조조에게 귀부할 때는 원술의 부하인 척기와 진익을 설득하여 조조를 따르도록 했고, 양주에 갔을 때도 매건과 진란과 뇌서 등 여러 유력자들을 설득하여 조조를 적대시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정말이지 대단한 세객(說客)이라 하겠습니다.
목민관으로서도 그는 일류였습니다. 기나긴 전란으로 완전히 황폐화된 양주 북부 일대를 재건하였고 떠도는 백성들을 정착시켰습니다. 치수(治水)를 통해 사람들의 삶을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역 일대를 더욱 풍요롭게 하여 국경을 지킬 기반을 구축했지요. 그것도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강성한 적들을 목전에 두고서 말입니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조조는 자신의 일평생에 걸쳐 가장 다급하고도 급박한 때에 유복을 발탁했습니다. 그리고 유복은 그 기대에 십분 부응했지요. 만일 그가 아니었더라면 조조는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어 결국 파멸에 이르렀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적벽에서 패배 후 합비까지 내주는 크나큰 위기를 맞이했을 수도 있지요. 그렇기에 유복이 홀로 동남쪽 국경을 지탱하면서 남긴 업적은, 비록 남들의 화려한 전공(戰功)에 비하면 그다지 빛나지 않아 보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