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인물들 01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명문가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지요. 게다가 아버지는 조정에서 존경받는 신하로 삼공을 비롯한 고위직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남자는 젊어서부터 그 재능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당대의 권력자 조조는 그를 냉큼 잡아다 자신의 승상부에다 집어넣고 주부(主簿. 비서관)로 삼았지요. 그의 이름은 양수. 자는 덕조(德祖)입니다.
그는 태생적으로 조조가 꺼릴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아버지는 한의 충신인 데다 외삼촌은 원술이었고 사촌 매형은 손권이었지요. 즉 양수는 스스로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어떤 식으로든 조조의 적들과 엮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조는 오히려 그를 주부로 삼아 지근거리에 두었습니다. 물론 일차적인 이유는 양수의 뛰어난 재능과 가문의 후광이 합쳐진 결과일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바로 곁에 둘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싶지요. 추측컨대 조조는 자신에게 잠재적인 적이 될 수 있는 존재일수록 오히려 가까이 두고 감시하려는 경향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전에 유비를 허도로 데려와 곁에 두고 감시했던 일이나, 내심 의심을 품고 있었던 사마의를 오히려 주부로 삼았던 사례처럼 말이지요.
양수는 재능이 뛰어났기에 또한 자신의 불안한 위치를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조조는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제거할 수 있었지요. 그렇기에 양수는 살아날 길을 탐색했고 마침내 발견했습니다.
조조는 드러내 놓고 다섯째 아들 조식을 총애했습니다. 아마도 조식의 빼어난 글재주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명분은 셋째 조비에게 있었습니다. 두 형이 모두 사망한 후 조비는 실질적인 적장자가 되었고 여러 중신들이 그를 지지하였지요. 하지만 조조는 적장자가 후계자라는 유가적 질서와 그 선택에 따르는 무수한 이점들을 무시할 정도로 조식을 아꼈습니다. 그렇기에 조비와 조식은 후계자로 선택받기 위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양수의 선택은 조비보다 한발 뒤처져 있는 조식이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양수는 조식의 편에 선 비교적 젊은 선비들 가운데서도 대표 격인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조비의 편에 선 자들 중 대표는 단언컨대 사마의였지요. 양수와 사마의는 흡사한 면이 많았습니다. 나이도 몇 살 차이 나지 않았고, 젊어서부터 능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바 있습니다. 맡고 있는 직책도 동일한 주부였고요. 또한 양씨와 사마씨 모두 몇 대에 걸쳐 고위 관료들을 배출해 온 엄청난 명문가였습니다.
양수가 조식의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조조의 묵인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조조는 사마의를 선택하여 직접 조비와 친교를 맺도록 주선했습니다. 두 아들에게 각각 든든한 버팀목을 제공해 준 셈입니다.
조조는 여전히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신속하고도 적확한 판단을 장기로 삼아 온 조조의 성향으로는 참으로 드문 일이었지요. 그는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조의 망설임 하에서 두 아들은 서로 공격을 주고받았습니다. 양수는 자신의 모든 재능과 인맥을 동원하여 조식을 지키고 조비를 공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자는 조비였습니다. 조조는 마침내 조비를 태자로 정해 후계자로 공표했지요. 하지만 동시에 조식의 식읍을 두 배로 늘려 1만 호에 달하도록 했으니, 여전히 조식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조식에게는 아직까지 실낱같으나마 희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외적인 요인에 의해 조비의 승리는 확고해지고 말았습니다. 조조는 유비와의 한중 전투에서 결국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패하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 소식은 매우 신속하게 사해에 퍼져나갔고, 위왕(魏王)의 위상은 소식이 퍼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곧장 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조조가 미처 장안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사방에서 반란이 들끓듯 발호했습니다. 심지어 위나라의 수도인 업 한복판에서도 유력한 명문가와 고관대작의 자식들까지 가담한 모반 시도가 적발되는 지경이었어요. 조조에게는 더 이상 후계자 자리를 뒤흔들어 정국을 불안하게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미 예순이 넘은 그의 나이까지 고려한다면 오히려 이미 정해진 태자의 앞길을 다져 후계를 튼튼히 해 주어야 했습니다.
219년 가을, 회군 도중 머무른 낙양에서 조조는 양수를 잡아들여 처형합니다. 나라의 기밀을 누설하고 제후들과 사사로이 교류한다는 죄목이었습니다. 양수의 나이 마흔다섯이었습니다.
한 달여 후, 조인이 형주에서 포위당하자 조조는 조식을 남중랑장(南中郎將)에 임명하고 정로장군(征虜將軍)을 대행하도록 하여 조인을 구원하라 명했습니다. 조식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를 일이었지요. 그러나 조식은 술에 취한 탓에 명령을 받들기 위해 궁으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어쩌면 양수의 죽음 이후로 매일처럼 술에 절어 지냈던 탓이 아니었을까요. 그 어처구니없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크게 후회하며 즉각 조식의 관직을 박탈했다고 합니다.
어째서 양수는 조식을 선택했을까요. 아무리 조조가 조식을 총애한다 해도 결국 명분과 대소 신료들의 지지는 조비를 향해 있었습니다. 후계자 결정은 결국 정치적인 고려에 의한 것이고 조식이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수는 조식을 선택했고, 그를 위해 몸을 바치다 결국 조조에 의해 제거되고 말았습니다. 양수는 '나는 본래부터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잠시 면하고 있었을 뿐(我固自以死之晚也)'이라고 말하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지요.
어쩌면 양수는 조식이라는 사람 자체에 호감을 느낀 게 아니었을까요. 양수의 나이는 조식보다 열일곱 살 많았습니다. 조식과 양수의 관계는 군주와 부하라기보다는 차라리 스승과 제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조금 과장을 섞자면 흡사 연인 사이 같을 지경이었지요. 조식은 양수를 며칠 보지 못하자 '그대를 생각하고 그리워함이 근심이 되었습니다(數日不見, 思子為勞, 想同之也)'라며 서찰을 보냈고, 양수는 '며칠 모시지 못하니 마치 한 해가 지난 듯합니다(不侍數日, 若彌年載)라고 회답했습니다. 두 사람의 교감은 그토록 큰 것이었습니다.
양수가 죽은 후 백여 일이 지나 조조 또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조비는 위왕이 되었고 그해 겨울에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았지요. 조비는 황제가 된 이후로도 한때 자신의 가장 위협적인 정적이었던 조식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하여 견제했습니다. 조식은 이후로도 십이 년이나 더 살았지만 욕됨과 한탄뿐인 불우한 삶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양수에게 있어 가장 큰 다행일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