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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Aug 22. 2019

사마의,
충신과 역적 사이에서

삼국지의 인물들 02

  사마의. 자는 중달(仲達). 삼국시대를 종결지은 진나라의 초대 황제 사마염의 할아버지이자, 그에 의해 고조 선황제로 추존된 자. 그리고 그 인물 자체보다도 촉한의 승상 제갈량의 대적자로서 더욱 유명한 이. 


    오래 살아남은 자가 최후의 승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처럼 사마의는 숙명적인 맞수 제갈량이 군중에서 병사한 이후로도 17년이나 더 살아남으며 위나라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지요. 그러나 그는 본심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어린 황제 조방을 내쫓지 않았으며, 일흔세 살로 사망할 때까지 위나라의 신하를 자처했습니다. 마치 그의 주군이었던 조조가 끝내 헌제를 폐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사마씨는 당대의 명문가였으며 특히 청류파의 거두로 꼽혔습니다. 청류파란 환관과 외척이 중심이 된 구 세력에 맞서 등장한 사대부 세력이, 상대를 탁류(濁流. 탁한 강물)로 부르며 스스로를 청류(淸流. 맑은 강물)에 빗댄 데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청류파는 탁류파의 연이은 공격을 받아 반쯤 결딴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당고의 금(黨錮之禁)이라 하는데, 이후 청류파들은 중앙정부로 진출하는 대신 속세를 버리고 도가적 신비주의에 빠지거나 혹은 권력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등 다소 정신승리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당고의 금으로 벼슬길이 막히기에는 사마씨 집안이 지나치게 명문가였습니다. 사마방의 아들 여덟은 모두 재능과 학식이 있다고 평해져 사마팔달이라 일컬어졌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둘째 사마의였습니다. 심지어 당대의 권력자 중 하나였던 조조마저도 201년에 그를 직접 벽소(辟召. 후한시대 인재 발탁 방법 중 하나. 명성이 높은 자를 관청에서 불러들여 벼슬을 내린다.)했을 정도였지요. 그러나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사마의는 놀랍게도 병을 핑계 대며 조조의 초빙을 거절합니다. 


   어째서였을까요. 사마의 자신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조조의 인재 욕심은 대단했습니다. 208년, 승상 지위에 오른 조조는 다시 한번 사마의를 초빙합니다. '만일 이번에도 거절하면 당장 잡아 가두어라'는 명령과 함께였습니다. 사마의의 선택은 7년 전과 달랐지요. 그는 마침내 조조에게 출사합니다. 


   조조는 일단 출사한 사마의를 몹시도 아꼈습니다. 처음에는 사마의를 문학연(文學掾. 승상부 내에서 경전을 가르치는 직책)으로 삼았지요. 그러나 이후 여러 자리를 거치게 했는데 그 직책은 황문시랑, 의랑, 승상동조속, 주부 등입니다. 처음 둘은 황제를 곁에서 보필하는 관리였고 뒤의 둘은 승상부의 인사담당자와 비서 역할이니 처음에는 비록 하급직이라도 빛이 나고 출세하기 좋은 자리를 주었다가 이후로는 자신의 직속으로 삼아 곁에 두었던 겁니다. 게다가 자신의 아들이자 이후 위나라의 초대 황제가 되는 조비와 친하게 지내도록 주선해 주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조는 어째서인지 사마의를 경계한 듯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후세에 낭고의 상이니, 세 마리 말이니 운운하는 허황된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어쩌면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조조만의 예감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연하게도 사마의는 제갈량보다 불과 두 살 많은 동년배였습니다. 주위에 명성을 날리면서도 은둔하여 지내다 마침내 출사한 것도 흡사하거니와 세상으로 나온 것 또한 206년과 208년으로 엇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유비가 칭제한 이래로 그의 생전에 제갈량이 이미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승상으로 오른 반면, 사마의는 그때까지도 태자 조비를 보필하는 태자중서자에다 군사마 정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주부까지 승진한 속도에 미루어 보면 의외로 중요한 직책을 맡지 못한 상황이었지요. 




   그로부터 다시 한동안 시간이 지나 마침내 227년이 되었습니다.


  촉한의 승상 제갈량은 선제 유비의 고명(顧命. 임금의 유언. 고명을 받는다는 것은 선대 황제가 가장 신뢰하고 믿는 신하에게 자신의 후계자를 맡긴다는 의미)을 받아 황제 유선을 보필하며 그 일생일대의 대업인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승상에 익주목, 녹상서사로서 촉한의 군사와 내정에 걸친 모든 권한을 한 몸에 짊어지고 있었지요. 


  사마의 또한 조비의 고명을 받아 젊은 황제 조예를 보필하고 있었습니다. 조비가 조진, 조휴, 진군, 사마의 네 사람에게 고명을 내리면서 아들 조예더러 '이 세 신하와는 틈이 생기더라도 결코 의심하지 마라'라고 당부할 정도였지요. 더군다나 조비가 생전에 전폭적으로 믿고 지지했던 사마의는 표기장군 무군 급사중 녹상서사로 온갖 실권을 틀어쥔 데 이어 형주와 예주 두 주의 군사를 총괄하는 권한까지 받아 그 권력이 실로 어마어마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제갈량은 다섯 차례에 걸친 북벌을 시작합니다. 앞선 세 차례의 북벌에서 제갈량을 상대한 자는 조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후 그 자리는 사마의가 이어받게 됩니다. 제갈량의 네 번째 북벌에서 마침내 두 사람은 양군의 총사령관으로 서로를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속도를 살린 기동전을 장기로 삼던 사마의는 처음에는 공세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노성 주변의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이후로 철저한 수세로 전환했고, 제갈량은 보급의 곤란에 이은 이엄의 배반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사마의는 장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을 추격케 했으나 오히려 제갈량의 반격을 받고 장합을 잃고 맙니다. 


   바야흐로 234년. 다섯 번째 북벌에 나선 제갈량은 적진 한복판인 오장원에 자리 잡고 둔전하며 장기전을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야속하게도 그는 병으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사마의는 촉한의 군사가 물러간 영채를 살펴본 후 제갈량에게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요.

 천하의 기재로다!

 



   249년. 당대의 권세가였던 사마의는 젊은 조상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이미 일흔한 살이었으니 늙은이라는 말이 과히 욕설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그는 노망 든 척하며 조상을 방심시킨 후, 고평릉 사변을 통해 정권을 탈취하고 조상 일파를 모조리 주살합니다. 이로써 사마씨는 명실상부하게 위나라의 실권을 독차지하게 됩니다.


   251년. 사마의는 일흔세 살로 눈을 감습니다. 이후 권력은 그의 두 아들인 사마사와 사마소에게 차례로 전해졌습니다. 


  사마의 사후 14년이 지난 265년, 그의 손자 사마염은 위나라 황제 조환으로부터 선양받는 형태로 진나라의 초대 황제가 되었습니다. 조비가 헌제로부터 황제 자리를 선양받은 것과 흡사한 형태였지요. 이로써 45년간 이어져 온 위(魏)는 멸망하고 대신 진(秦)이 건국됩니다. 


   280년. 사마염은 촉에 이어 오나라까지 멸망시키며 삼국을 통일합니다. 이로써 삼국시대 뭇 영웅들의 이야기는 마침내 끝을 맺습니다. 사마의는 그의 손자가 황제에 올라 천하를 통일하는 모습을 보며 무덤 속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의 가문이 마침내 천하를 거머쥔 것을 기뻐했을까요, 혹은 그를 아끼고 믿은 친구이자 주군 조비의 나라가 멸망한 것을 보며 서글퍼했을까요. 



   그 답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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