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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Oct 01. 2019

이통,
주군을 제대로 고른 혜안

삼국지의 인물들 15


  이통은 자(字)가 문달(文達)이며 형주 강하군 평춘현 출신으로 168년생입니다. 천하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여러 유력자들이 저마다 병사를 모으고 무리를 규합했을 때 이통 역시 여남 일대에서 자신의 세력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이통 외에도 진공, 주직 등 여러 유력자들이 같은 지역에서 각축을 벌였습니다. 이통은 처음에는 동향 사람인 진공과 함께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차츰 마음이 맞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이통은 독단적으로 일을 꾸미지요. 주직을 연회에 초대한 후 그를 살해하고 무리를 흡수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운 겁니다. 


  때마침 진합이라는 자가 진공을 죽였기에 그 또한 처단했습니다. 또 황건적의 잔당인 오패라는 자를 사로잡고 그 부하들까지 아우르면서 이통은 명실상부하게 지역의 일인자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이후 대기근이 들자 이통은 집안이 기울 정도로 재산을 풀어 사람들을 구제함으로써 명성을 얻었습니다. 




  건안 초에 조조가 천자를 옹립하자 이통은 무리를 이끌고 조조에게 귀순합니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조조의 부하가 되었다기보다는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면서 조조의 세력 아래에 편입된 준독립세력에 가까워 보입니다. 조조는 그에게 진위중랑장(振威中郞將) 벼슬을 주고 여남 서쪽에 주둔하도록 하지요. 이후 장수가 유표와 손잡고 조조를 위기에 빠뜨렸을 때, 이통이 군사를 이끌고 와 조조와 합류한 후 선봉이 되어 적을 격파하는 수훈을 세웁니다. 그래서 비장군(裨將軍)이 되고 건공후(建功侯)에 봉해졌으며 나아가 여남의 두 현을 관할하는 양안도위(陽安都尉)로 임명되는데 이는 태수급에 해당하는 지위입니다. 


  200년경, 조조가 원소와 대치할 때 원소는 이통을 회유하려 합니다. 조조의 후방에 위치한 준독립세력인 이통이 자신에게 합류한다면 조조의 전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었지요. 또 원소와 동맹 관계였던 유표 역시도 이통을 끌어들이고자 했습니다. 


  당시 원소의 세력은 조조에 비해 압도적인 수준이었습니다. 또 원소가 파견한 유비가 황건적의 잔당인 유벽, 공도 등과 손잡고 여남 일대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조조가 파견한 채양마저 그들에게 격파당해 목이 달아날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지요. 예주의 여러 군현들이 이미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에게 붙은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여남은 양양에서 멀지 않았기에 유표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습격해 올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통은 무척이나 위험한 처지에 홀로 고립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이통의 일가붙이와 부하들은 모두 원소에게 항복하자고 안달복달했습니다. 그러나 이통은 그런 의견을 단번에 거절합니다. 그는 칼자루를 움켜쥐고 그들을 질타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조공은 명철하여 반드시 천하를 평정할 것이다. 반면 원소는 비록 강성하지만 사람을 쓰는 데 있어 일관된 방책이 없으니 끝내 패할 수밖에 없다. 나는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는 않겠다.”


  이통은 원소의 사자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입니다. 또 지역 내의 반란군인 구공, 강궁, 심성 등을 모조리 격파하고 수급을 조조에게 바치지요. 그리고 급히 군용 물자를 거두어 조조에게 보급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한 공로와 충성심을 조조로부터 인정받아 여남태수(汝南太守)가 되고, 또다시 장적이라는 자도 토벌했습니다. 


  적벽대전 이후 유비와 주유가 남군을 포위하자 조인이 위기에 빠집니다. 과거 조조를 구원했던 이통이 또다시 구원투수로 나서지요. 하지만 유비는 원군을 막기 위해 이미 관우를 남군 북쪽에 배치해 둔 상태였습니다. 관우는 길 도중에 진채를 구축하고 녹각(鹿角)을 빽빽하게 엮어 적을 막아낼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이런 난관에 맞닥뜨린 상황에서 이통은 실로 무시무시한 용맹을 보여줍니다. 관우의 방어선이 쉬이 뚫리지 않자, 이통은 말에서 내려 직접 녹각을 걷어내면서 적의 진영 한가운데로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나아가면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지요. 그 결과 강릉성을 버리고 도망치던 조인을 간신히 구출해낼 수 있었으니, 이통의 용맹무쌍함이 아니었더라면 조인은 관우에게 사로잡혀 목숨을 내놓아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치열했던 전투는 이통에게도 버거웠던 모양입니다. 그는 여남으로 돌아오던 도중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당시 나이는 고작 42세였습니다. 




  이통은 실로 용맹한 장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직하기도 했지요. 이통의 처백부(妻伯父)가 현에서 죄를 지어 사형을 받게 되자 아내가 이통에게 그 사람을 구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통은 여남의 두 현을 관할하였기에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처백부를 구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사로운 정 때문에 조조의 믿음을 저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지요. 그만큼 꼿꼿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통의 가장 큰 장점은 주군을 알아볼 줄 아는 혜안이었습니다. 


  조조가 원소와 대치하고 있을 때는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만큼 원소의 세력이 강성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열 중 여덟아홉은 조조가 패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부하들 중에서도 남몰래 원소와 내통한 이들이 많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통은 조조가 끝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원소나 유표의 요청을 뿌리쳤습니다. 결국 조조는 관도에서 원소를 격파하고 마침내 하북을 평정하기에 이르렀으니 이통의 주인 보는 눈이 정확했다고 하겠습니다. 


  삼국지의 시대에는 뛰어낸 인재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을 잘못 고르는 바람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 또한 적지 않았지요. 여포의 부하였던 고순과 진궁, 원소의 부하였던 전풍과 저수 등이 모두 그러한 사례입니다. 반면 이통은 스스로의 안목으로 조조를 주군으로 모셨고 죽는 날까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간에 사람 보는 눈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예전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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