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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Oct 17. 2019

방덕,
버림받은 자의 새로운 충성

삼국지의 인물들 21


  방덕은 자를 영명(令明)이라 하며 옹주 남안군 환도현 사람입니다. 다만 그가 태어난 때는 아직 옹주가 량주에서 분리되어 나오기 전이었고 남안군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굳이 출생 시점으로 따지자면 량주 천수군 출신이라 하겠습니다. 젊어서부터 군의 관리가 되었고,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있던 마등의 휘하에서 반란을 일으킨 강(羌)족과 저(氐)족 등 이민족을 토벌하며 공을 세웠습니다. 


  조조가 원씨 일가를 토벌할 때, 원담은 곽원과 고간을 보내 크게 북쪽을 우회하여 하동군 일대를 공격합니다. 이때 마등은 한수와 더불어 서북부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였는데 종요의 설득으로 결국 조조의 편을 들기로 결심하고는 아들인 마초와 함께 방덕을 파견합니다. 두 사람은 곽원과 고간을 대파하였습니다. 특히 방덕은 직접 적의 장수인 곽원의 머리를 베어 용맹을 떨쳤습니다. 이로써 그는 중랑장(中郎將)이 되고 열후(列侯)에 봉해집니다. 


  이후 장백기라는 자가 홍농군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방덕은 마등을 따라 종군하여 적을 격파합니다. 이렇듯 방덕은 전장을 누비면서 항상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용장이었습니다. 그 무용은 마등군에서도 마초와 더불어 수위를 다툴 정도였지요. 


  마등은 나이가 들자 가족들과 함께 업으로 이주합니다. 즉 조조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었습니다. 조조는 보답으로 마등에게 위위(衛尉)라는 지위를 주었는데 구경(九卿)에 속하는 고위직입니다. 더불어 아들 마초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여 량주에서 마등의 세력을 이어받도록 해 주지요. 이때 방덕은 마등을 따라가지 않고 마초의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초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의 죽음마저도 감수하며 한수 등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방덕은 당연히 그를 수행하여 전투에 참전했지요. 마초가 결국 조조에게 패했을 때도 그는 마초를 저버리지 않았고, 그가 한중으로 가 장로에게 투신할 때도 여전히 함께했습니다. 참으로 충직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허나 주인을 향한 방덕의 충성심은 보답받지 못했습니다. 장로의 휘하에서 불안감을 느끼던 마초는 결국 유비에게 투항하는데, 이때 방덕을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그간 방덕이 바쳐온 충성을 생각하면 결코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지요. 그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방덕은 아마도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항복합니다. 방덕의 무용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조조는 그에게 입의장군(立義將軍)을 배수하고 관문정후(關門亭侯)로 봉했을 뿐만 아니라 식읍 삼백 호를 주는 등 크게 후대합니다. 


  이후 방덕은 조인에게 배속되어 형주 일대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완에서 후음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인과 함께 진압하였지요. 또 관우가 양번을 공격해 오자 남쪽으로 가서 번성에 주둔하며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관우의 기세가 워낙 대단하여 버텨내기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그렇게 불리한 상황이 되자 번성 안의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합니다. 방덕의 옛 주인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했고 또 사촌 형인 방유도 한중에 있으니만큼 방덕이 적에게 투항할지 모른다는 거였지요. 그 말을 들은 방덕은 몹시 억울해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라의 은혜를 입은 몸이니 죽음으로 보답하겠소. 내가 직접 관우를 칠 것인데, 올해 안에 관우를 죽이지 못한다면 차라리 관우에게 죽겠소.”


  방덕은 자신의 말을 지켰습니다. 병력을 이끌고 수차례나 관우를 공격했으며, 심지어 직접 화살을 쏴서 관우의 이마를 맞히기도 했습니다. 그의 기세가 워낙 거칠다 보니 관우의 부하들은 방덕을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방덕이 항상 백마를 타고 다녔기에 그런 명칭을 붙인 것이죠. 이후 우금이 칠군을 이끌고 구원을 오자 조인은 방덕을 북쪽으로 보내 자신과 우금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십여 일이나 비가 오면서 한수가 범람하자, 번성 바깥에 주둔한 병사들은 모두 제방 위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관우는 배를 타고 그들을 공격했지요. 좁아빠진 제방 위에 빼곡하게 모인 이들을 향해 관우의 병사들이 큰 배 위에서 화살비를 쏟아부었습니다. 그건 전투라기보다는 차라리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방덕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갑옷을 입고 직접 활을 들어 관우의 병사들을 저격했는데 쏘는 화살마다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가 뜰 무렵부터 정오가 지나도록 항전하였지요. 마침내 화살이 다 떨어지자 이번에는 칼을 쥐고 돌격해서 접전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또 휘하의 장수들이 항복하려 하니 그들을 베어 죽이면서 끝까지 적과 싸울 의지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말했지요. 

  “내가 듣기로 훌륭한 장수(良將)는 죽음을 겁내 도망치려 하지 않고, 절의 있는 선비(烈士)는 절개를 꺾어 생명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오늘이 내가 죽을 날임을 알겠다.”


  끝까지 혈투를 벌인 방덕의 곁에 남은 부하라고는 오직 장수 한 명과 하급 지휘관 둘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방덕은 끝까지 저항했지요. 하지만 타고 있던 배가 물결에 뒤집히는 바람에 결국 포로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방덕의 그런 엄청난 무용은 관우에게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관우는 그대를 장수로 세우려 하니 어서 항복하라고 권하지요. 그러나 방덕은 단칼에 거절하며 오히려 일갈했습니다.

  “이 더벅머리 아이 놈아. 어디서 감히 항복을 운운하는 게냐? 위왕(조조)께서는 백만 군사를 거느리고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 계신다. 네놈들의 주인인 유비는 한낱 용렬한 자인데 어찌 대적할 수 있겠느냐! 나는 역적의 장수가 되느니 차라리 나라의 귀신이 될 것이다.”

  결국 방덕은 그렇게 절의를 굽히지 않고 죽었습니다. 조조는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다고 합니다. 




  방덕은 삼국지에 기록된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개인의 무용으로는 단연 최상급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일단 대규모 전투에서 장수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적장을 죽인 것은 무척이나 드문 일입니다. 안량을 죽인 관우에 비견할 수 있을 만한 용맹이지요. 또 활을 쏘아 관우의 이마를 맞힌 사례나 쏘는 화살마다 빗나가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면 여포, 태사자와 더불어 손꼽히는 명궁이기도 합니다. 방덕은 그런 일신의 용맹으로 마등과 마초 부자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앞서 서술하였다시피 마초에게 버림받고 말았지요. 


  그런 방덕을 인정하고 높은 지위를 준 인물이 바로 조조였습니다. 방덕은 자신의 새로운 주인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했던 것 같습니다.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싸웠습니다. 그 활약상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가 쏜 화살에 맞은 바 있었던 관우조차도 진심으로 항복을 권유할 정도였죠. 


  그만큼 했으면 조조의 은혜에 충분히 보답했다고 생각할 법도 합니다. 심지어 삼십 년 동안이나 조조를 섬겨 왔던 우금마저도 관우에게 투항한 상황이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방덕은 끝내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말을 지켜 죽음으로 조조의 은혜에 보답했지요. 마초는 대체 어째서 이토록 충성스러우면서도 유능한 부하를 저버린 것일까요.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여담입니다만 훗날 촉한이 멸망했을 때, 방덕의 아들 방회가 등애와 종회를 따라 종군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로 입성한 그는 관씨 일가를 모두 몰살시킴으로써 아버지의 복수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방덕의 넋이 그런 식의 복수를 달가워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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