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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Oct 24. 2019

노숙,
천하를 꿈꾼 야심 찬 영걸(1)

삼국지의 인물들 24

  노숙은 자(字)가 자경이며 서주 임회군 동성현 출신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의 손에 자라났지만, 집안이 워낙에 부유했던 터라 딱히 고생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그 재산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또 친구를 사귀는 데 힘써서 뭇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또 젊어서부터 칼 쓰는 법과 말 타기를 배웠고, 인근의 젊은이들을 모아 입히고 먹이면서 은밀히 자신의 사병으로 삼았으니 아마도 남모르는 야망이 있었던 걸로 추측됩니다. 


  그러던 중에 인근 거소현의 현장이 된 주유가 노숙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혼자 온 게 아니고 수백 명이나 되는 무리를 데리고 와서는 돈과 식량을 요청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협박 내지는 강탈에 가까워 보이는 행동이었습니다만 노숙은 그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노숙의 집에는 곡식 삼천 석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가 둘이나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통째로 내주었다고 하지요. 주유도 노숙의 그런 대범한 행동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두 사람은 이내 매우 깊은 친교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후 원술이 노숙의 명성을 듣고는 그를 동성현의 현장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노숙은 원술 따위의 아래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대신 노숙은 그동안 양성한 사병들을 이끌고 집안 일가붙이들과 함께 남쪽으로 이주해 버립니다. 이는 당시 노숙의 집안이 고향에서 축적한 재산과 명성과 영향력을 일거에 포기해 버린 과감한 결정이었습니다. 이때 그를 잡으려는 주(州)의 기마병들이 따라붙었는데, 노숙은 추격자들을 설득하는 한편 활을 쏘아 그들의 방패를 꿰뚫음으로써 물러가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남쪽으로 간 노숙은 친구인 주유에게 의탁합니다. 이후 주유가 손책을 따라 장강을 넘어 강동으로 갈 때 그도 따라가지요. 하지만 손책을 주군으로 모실 생각까진 없었던 모양입니다. 하기야 당시 손책은 기껏해야 원술의 부하 정도의 위치였으니, 원술 본인의 요청도 걷어차 버린 그가 굳이 손책에게 굽히고 들어가지는 않았겠지요. 그래서 주유를 끝까지 따라가지는 않고 도중에 회계군 곡아현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때 친구 유엽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옵니다. 함께 정보라는 자를 섬기지 않겠느냐는 권유였지요.(유엽은 훗날 조조의 수하가 되는 바로 그 유엽이고, 정보는 대대로 손씨를 섬겨 온 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인물입니다.) 정보가 벌써 만 명이 넘는 무리를 모았다는 소식을 들은 노숙은 마음이 동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할머니의 상을 치르러 고향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고향에 다녀와 보니 친구 주유가 일을 저지른 게 아니겠습니까. 노숙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 어머니를 오현으로 모시고 간 겁니다. 전에는 강도짓을 하러 오더니 이번에는 노약자 유괴인 셈이네요. 때마침 손책이 죽고 동생 손권이 그 세력을 물려받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주유는 오히려 태연한 태도로 노숙에게 말했습니다. 


  “옛적 마원이 광무제에게 ‘당금 세상에는 비단 주군이 신하를 선택할 뿐만 아니라 신하도 주군을 선택합니다.’라고 말하였소. 지금 나의 주인(손권)은 현명한 이를 가까이하고 선비를 귀하게 여기며 특별한 재능이 있는 자를 받아들이고 있소. 또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유씨를 대신할 자는 반드시 동남쪽에서 일어난다 했소. 지금 사세를 살펴보면 가히 제왕의 사업을 일으킬 만하니 뜻있는 선비라면 용과 봉황을 타고 날아오를 때가 아니겠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너 나랑 큰 일 한 번 해 보자. 


  본래 큰 뜻이 있었던 노숙은 주유에게 동의하고 마침내 손권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리고 손권은 노숙과 단 둘이서 술을 마시면서 은근히 속내를 떠보았습니다. 

  “지금 한 황실이 기울자 사방에서 군웅들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소. 나는 아버님과 형님의 뜻을 이어받아 제환공(濟桓公)과 진문공(晋文公)의 공업을 세우고자 하는데, 그대는 나를 어찌 보좌하겠소?”

  제환공과 진문공은 둘 다 춘추시대의 패자(霸者)로, 주나라 왕실을 받든다는 명분 하에 뭇 제후들의 위에 섰던 이들입니다. 그러니 한나라 황실을 받들면서 천하를 평정하겠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노숙의 대답이 실로 놀라웠습니다. 

  “장군께서 어찌 제환공과 진문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살펴보니 한실은 이미 부흥할 수 없고 조조는 속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장군을 위한 계략은 강동에 걸터앉아 천하의 형세를 살피는 것입니다. 조조는 북쪽에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으므로 지금 장군의 세력 정도는 크게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북쪽으로 갈 때 장군께서는 황조를 공격하고, 나아가 유표를 토벌하여 장강 일대를 모두 장악하십시오. 연후에 스스로 연호를 세우고 제왕을 자처하면서 천하를 도모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한 고제(유방)의 업적과 같습니다.”


  제환공과 진문공이 아닌 한 고제가 되어라. 즉 너의 나라를 세우라는 의미입니다. 이쯤 되면 이미 최소한의 눈가림조차 집어치우고 본격적으로 천하를 한 번 차지해 보자는 거지요. 그 노골적인 이야기를 듣고 손권은 깜짝 놀라서 나는 그런 뜻이 없다, 그저 한 황실을 보좌하기만을 원할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손권의 본심은 사실 노숙이 간파한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손권은 이후 무척이나 노숙을 아끼게 됩니다. 장소 같은 깐깐한 이들은 노숙이 지나치게 거칠고 오만하다면서 비난했지만, 손권은 오히려 노숙의 어머니에게 많은 금은보화를 내려 예전처럼 부유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후 유표가 병들어 죽고 조조가 형주를 노립니다. 한동안 평화로웠던 강동도 큰 변혁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형주가 조조의 손에 들어간다면 다음은 바로 동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손권은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했습니다. 조조에게 굽히고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그에게 대항할 것인가. 이때 노숙이 나서서 손권에게 앞길을 제시합니다. 개략적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형주는 땅이 비옥하고 인구가 많아서 제왕의 업을 이룰 만한 근거지입니다. 지금 유표가 죽었는데 두 아들 유기와 유종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또 유비는 천하의 영웅이지만 유표는 그를 경계하여 중용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유기, 유종과 유비가 서로 협력한다면 우리는 응당 그들과 결맹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가 결국 멀어진다면 또 다른 계획을 세워야 마땅합니다. 제게 명을 내려주시면 유표의 조문을 핑계로 형주에 가서 유표의 아들들과 유비가 저희와 손잡고 한마음 한뜻으로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설득하겠습니다. 적어도 유비는 반드시 기뻐하며 응할 것입니다. 조조가 공격해 오기 전에 속히 보내주십시오.”


  천하의 형세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 형주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혜안. 손권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전략적 식견. 유비와 손잡고 조조에게 맞서야 한다는 판단력. 즉시 형주로 달려가겠다는 실행력. 이 길지 않은 말 속에서 그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손권은 깨달았지요. 이제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확실히 정해야 할 때라는 걸 말입니다. 


  손권이 한 지역의 지배자 정도에서 만족하려면 조조에게 항복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천하를 다투고자 한다면 조조에게 맞서야 했습니다. 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손권은 즉시 노숙을 형주로 보냅니다. 


  그러나 조조의 행동은 예상 이상으로 신속했습니다. 노숙이 장강을 따라 형주로 가던 도중에 조조는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노숙이 남군에 이르렀을 때 유종은 이미 조조에게 투항했고 유비는 남쪽으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노숙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유비를 맞이하러 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양에서 유비와 만났습니다. 조조에게 따라 잡혀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목숨만 건져 살아난 유비를 말입니다. 


  노숙은 유비에게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묻습니다. 유비는 창오태수 오거라는 자에게 의탁할 것이라고 대답하지요. 창오군은 중국 대륙의 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교주에 속한 지역입니다. 즉 유비의 말은 이제 중원을 떠날 것이라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노숙은 고개를 저으며 다른 방법을 제시합니다. 우리와 손을 잡자고, 함께 조조에게 대항하자고. 


  유비에게는 기사회생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가능성이자 기회였습니다. 


  유비는 매우 기뻐하며 응낙합니다. 일단 노숙의 제안에 따라 강하군 악현의 번구라는 곳으로 이동한 후, 심복 한 사람을 사자로 삼아 동오에 가 동맹을 맺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막중한 임무를 맡은 자는 그간 유비 휘하에서 오래도록 복무하며 외교 관련 업무를 전담했던 손건도 아니요, 천하에 명성이 드높은 미축도 아니었습니다. 유비가 보낸 자는 고작 스물여덟 살에 불과한 젊은이였습니다. 그 이름은 제갈량. 노숙과 같은 서주 출신으로 친한 사이였던 제갈근의 동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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