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인물들 24
노숙은 제갈량과 함께 동오로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그 여정 동안 우정이 깊어졌겠지요. 당대에서도 손꼽히는 인물들이었으니 자연 서로를 알아보고 인정하지 않았겠습니까. 또한 두 사람은 각기 주군의 복심이라 할 만한 이들로서 공감대도 있었을 겁니다. 천하를 바라보는 방향 또한 비슷했죠. 물론 제갈량은 유비를 위했고 노숙은 손권을 위했지만, 어쨌거나 두 사람은 양 세력이 손잡고 조조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습니다.
그런데 동오에 도착해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손권의 부하들 대다수가 조조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겁니다. 상황을 파악한 노숙은 화장실에 가는 손권을 뒤쫓아갔습니다. 손권이 노숙을 보며 탄식하듯 말했지요.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 그러자 노숙이 대답했습니다. “저나 다른 자들이 항복하면 아마도 조조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을 것이고, 지위도 지금보다 낮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장군께서 항복하신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결코 지금처럼 존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 한심한 자들의 말을 듣지 마시고 모쪼록 원대한 계획을 정하십시오.” 그 말을 들은 손권은 노숙이야말로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사람이라고 감탄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오에서 노숙의 발언권은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외지에서 흘러들어온 인물로 동오에는 기반이 없었을뿐더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됨이 거칠고 오만하다는 이유로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숙은 자신과 뜻을 같이해줄 사람을 찾아갑니다. 바로 양주 여강군 출신으로 대대손손 동오에 터 잡고 살아온 호족이자, 선대 손책과는 마치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였으며, 노숙 자신과도 절친한 친구인 주유였습니다. 이때 주유는 외지로 향하고 있었는데 노숙은 직접 쫓아가서 그를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강력하게 주장한 끝에 마침내 동오는 조조와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주유가 군사 삼만 명을 이끌고 나아갈 때 노숙은 찬군교위(贊軍校尉)가 되어 그를 보좌합니다. 주유와 유비의 연합군은 마침내 적벽에서 조조를 크게 격파하지요. 노숙이 돌아오자 손권은 여러 장수들에게 그를 영접하도록 했고, 그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는 물었지요.
“자경. 내가 말에서 내리는 그대를 부축해 준다면(윗사람을 대하듯 예우를 갖춘다면) 그대의 공을 빛내기에 충분하겠소?”
그런데 노숙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충분치 못합니다.”
그 말을 듣고 경악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노숙은 태연히 자리에 앉아 말을 이었습니다.
“바라건대 지존께서 성덕을 사해에 떨쳐 천하를 통일하여 제왕의 사업을 완성한 후, 다시 수레를 보내어 저를 불러들이신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저의 공이 빛나겠습니다.”
과연 손권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부터 누누이 제왕의 사업을 주창해 온 노숙다운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손권은 크게 기뻐하여 손뼉을 치며 웃었다고 합니다.
이후 유비는 형남 네 군을 평정합니다. 손권은 그와 자신의 여동생을 결혼시켜 동맹을 굳건히 하고자 했지요. 유비는 직접 손권을 찾아와 앞으로의 일을 논의합니다. 이때 유비가 요청한 것이 바로 ‘형주를 빌리는’ 것이었습니다.
땅을 내달라는 유비의 요구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여범 같은 이들은 제 발로 호랑이 입 속에 들어온 유비를 사로잡자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노숙은 조조의 적과 손권의 친구를 늘려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 주어야 한다고 홀로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손권은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주기로 합니다. 전후의 사정을 살피면 대략 남군과 무릉 일대는 유비의 소유로 인정해 주고, 영릉/계양/장사 세 군은 빌려주는 형태로 하여 정리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확실한 사실은 아닙니다. 여하튼 그렇게 하여 유비와 손권은 서로 단단하게 결속되어 조조에게 대항하는 구도를 형성하였습니다. 조조는 손권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붓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군에 주둔한 주유의 병이 깊어졌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상소하여 노숙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합니다. 손권은 노숙을 분무교위(奮武校尉)로 임명한 후 주유의 관할 하에 있었던 병사를 모두 그에게 맡겼습니다. 노숙은 처음에는 주유처럼 강릉에 주둔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군을 유비에게 내주고 육구로 옮겨 주둔합니다. 이로써 동오의 서쪽 국경은 대부분 그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211년에 유비가 익주로 들어갑니다. 관우가 남아 형주를 진수했지요. 관우와 노숙이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게 되자 경계 지역에서 종종 분쟁이 생겼는데, 그때마다 노숙은 우호적인 태도로 사태를 진정시켰습니다. 동맹 간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 것이지요. 그러는 한편으로 214년에는 손권을 따라 환성을 점령하는 데 공을 세워 횡강장군(橫江將軍)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비가 마침내 익주를 차지하자 상황이 바뀝니다. 손권이 영릉, 계양, 장사 세 군을 돌려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하지만 유비는 거부했습니다. 크게 화가 난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세 군을 빼앗고, 동시에 노숙이 여몽을 뒤에서 지원하도록 합니다. 익주의 유비를 지원하느라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관우는 순식간에 세 군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분노한 유비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형주로 질풍처럼 진군해 왔지요. 과거 동맹 관계였던 유비와 손권이 바야흐로 전쟁에 돌입하려던 급박한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214년에 일어난 이른바 ‘익양대치’입니다.
그러나 노숙은 유비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손권이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비와 손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신념을 평생 동안 관철했습니다. 만일 양 군사들이 충돌한다면 결국 조조에게만 이득이 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숙은 관우에게 회담을 요청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단도 한 자루씩만 지닌 채 만나기로 했지요. 부하들이 위험하다면서 반대했지만 노숙은 대담한 태도로 회담을 강행했습니다.
회담이 좋은 결과를 낳지는 못했습니다. 형주에 대해서는 유비와 손권 둘 모두에게 나름대로의 명분과 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비 측은 자신들이 힘들여 직접 점령한 형남의 영토를 고스란히 손권에게 넘겨주는 게 억울했겠지요. 반대로 손권 측도 땅을 빌려간 사람이 막상 돌려줄 때가 되자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격이니 역시 화가 났을 겁니다. 그래서 관우와 노숙의 회담은 별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다만 이때 노숙은 벽력같이 고함을 질러 상대를 질타하고 관우의 군세를 깎아내리는 등 상당히 강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연의에서의 묘사처럼 추한 꼴을 보인 건 결코 아닙니다.
다행히도 양군은 충돌하기 직전에 무기를 거두었습니다. 얄궂게도 조조가 움직인 덕분이었습니다.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공격하려 들자, 위기감을 느낀 유비가 형주 절반을 내주는 걸로 합의를 끝내고 급히 익주로 되돌아간 겁니다. 그리하여 형주 서남부인 남군, 무릉군, 영릉군은 유비의 차지가 되었고 동남부인 강하군, 장사군, 계양군은 손권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후 당분간 형주에서 더 이상의 영토 다툼은 없었습니다.
노숙은 217년에 사망합니다. 당시 46세로 결코 많은 나이는 아니었습니다. 손권은 그를 추모하여 직접 장례식에 참가할 정도였습니다. 또 제갈량도 노숙의 부고를 듣고는 그를 무척이나 애도했다고 전해집니다.
노숙은 연의에서 얼빠진 무골호인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그만큼 호방하면서도 야심에 찬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심지어 노숙은 자신의 야심을 딱히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군주인 손권조차도 한실 부흥이라는 대의명분 뒤에 자신의 본심을 감추었지만, 노숙은 그런 손권의 야망을 오히려 자극하여 드러내기까지 합니다. 그는 천하를 원했고, 자신의 주군인 손권이 천하를 차지하여 한 고제의 위업을 성취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써 유비와의 동맹을 주창했는데 당시 조조의 강성함을 생각해 본다면 가히 탁월한 식견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노숙의 죽음은 천하의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평생 유비와의 동맹을 유지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던 노숙과는 달리, 그 후임자인 여몽은 눈앞의 이익에 더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관우가 지키고 있던 형주의 나머지 절반 말이지요. 그리고 그건 군주인 손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하여 동오는 끝내 동맹을 배신하고 관우의 후방을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노숙은 자신의 주군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결국 손권은 스스로 조연의 길을 택하고 말았던 겁니다.
관우를 죽이고 마침내 형주를 차지했을 때 손권은 무척이나 기뻐했지요. 그러나 그건 노숙이 생전 안배하였던 대전략의 붕괴를 의미했습니다. 유비와 손권이 손잡고 조조에게 대항한다는 기본 방침이 무너져 내린 것이지요. 그로 인해 절대 권력자 조조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위기를 맞이하고도 위나라는 너무나 평온하게 그 시기를 넘깁니다. 이후 온갖 우여곡절 끝에 촉한과 동오의 동맹이 부활했습니다만 이미 뒤늦은 후였습니다. 결국 촉한과 동오는 뚜렷한 체격차를 극복하지 못한 채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노숙이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떠했을까. 두 나라 간의 동맹이 파탄 나지 않고 끝까지 이어졌으면 어떠했을까. 관우가 양번을 공격하며 중원을 진동시켰을 때, 동오가 그 뒤를 치는 대신 오히려 관우와 손잡고 함께 위나라를 공격했으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이들이 그런 가정을 해 보곤 합니다. 물론 역사에 만일이란 없는 법이니 부질없는 행동일 따름이지요. 그럼에도 노숙의 죽음은 너무나 큰 손실이었습니다. 손권에게도, 유비에게도, 그리고 훗날의 제갈량에게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