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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Oct 10. 2019

정욱,
누가 나이를 핑계 삼는가

삼국지의 인물들 19


  정욱의 본명은 정립(立)이며 자는 중덕(仲德)입니다. 연주 동군 동아현 출신이지요. 욱(昱)은 조조가 새로 붙여준 이름이라고 합니다. 정욱이 해(日)를 받들고 서 있는(立)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는 그런 이름을 내렸다고 전해지지요.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용모가 뛰어나면 곧 그 사람의 재능도 뛰어날 거라는 통념이 있었기에 굳이 사서에까지 그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2천 년 후의 현대 사회에서도 그런 선입견은 여전히 완전히 불식되지 않고 남아있지요. 


  여하튼 키 크고 잘생긴 정욱은 이른바 지역 유지 출신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현령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고 현승(丞. 수령의 보좌관)은 오히려 황건적에게 호응하여 동아현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정욱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단 성 밖으로 피신했다가, 황건적 일당이 성을 지키기 않고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그들이 단지 숫자만 많을 뿐 성을 지킬 만한 능력도 의지도 없음을 간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설득해 도로 성으로 돌아가려 하지요. 하지만 다른 자들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자 자신의 부하 몇몇을 황건적으로 꾸며서 마치 이쪽을 공격하려는 것처럼 위장합니다. 크게 놀란 관리와 백성들은 별 수 없이 정욱의 말대로 다시 성으로 돌아갔습니다. 정욱의 이런 기지가 있었기에 동아현은 황건적의 난이 휩쓸고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연주의 자사는 유대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정욱의 명성을 듣고 초빙하려 했지만 정욱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북에서 원소와 공손찬이 크게 충돌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들은 제각기 유대를 설득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지요. 어떻게 해야 할지 머뭇거리던 유대는 정욱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정욱은 원소의 편에 서는 게 낫다고 대답했지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원소는 공손찬을 격파합니다. 감탄한 유대는 또다시 정욱에게 벼슬을 주려 했지만 정욱은 이번에도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이후 유대가 황건적의 잔당과 교전하다 전사하자, 제북상(濟北相)으로 있던 포신이 앞장서서 조조를 연주자사로 추대합니다. 그리고 인재를 갈구하던 조조가 재차 정욱을 초빙했지요. 정욱은 놀랍게도 대뜸 응합니다. 고향 친구들이 깜짝 놀라서 물었지요. 너는 예전에 유대가 부를 때는 왜 거부하다가 조조가 부르니까 가는 거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정욱은 대답 대신 그저 웃을 뿐이었습니다. 조조야말로 자신이 섬길 만한 주군이라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정욱은 조조 아래에서 현령으로 벼슬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조조의 절친한 친구였던 장막이 그를 배신하고 진궁 등과 연합해 여포를 끌어들입니다. 조조가 떠난 연주는 순식간에 여포의 손에 대부분 넘어갔지요. 이때야말로 조조의 일생에 걸쳐 가장 위급했던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견성, 범, 동아 등 세 개의 현만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순욱과 정욱이 후방에 남아 있었는데, 순욱은 견성을 지켰고, 정욱은 범현과 동아현을 찾아가 현령과 관리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적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합니다. 그래서 조조가 돌아올 때까지 세 개의 성을 지켜낼 수 있었지요. 조조는 정욱의 손을 잡으며 감탄했습니다. 

  “그대가 아니었던들 나는 돌아올 곳조차 없었을 것이오!”


  이후 조조는 여포와 수차례나 교전했으나 전세가 매우 불리했습니다. 이때 원소가 조조더러 자신에게 굽히고 들어올 것을 권하지요. 잔뜩 의기소침해 있었던 조조는 그 요구를 받아들여 가족을 인질로 보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정욱이 극력 반대하며 그러지 못하도록 설득합니다. 마침내 조조도 마음을 바꾸었지요. 그리고 결국 원소와 맞설 수 있으리만큼 성장했습니다. 


  이렇듯 정욱은 몇 차례나 조조를 위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조조는 천자를 허도로 모신 후에 정욱을 상서(尙書)로 삼고, 이후 다시 동중랑장(東中郎將)으로 삼아 연주 전체를 감독하도록 함으로써 그간의 공훈에 보답합니다. 


  이후로도 정욱의 활약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원소 및 그 자식들과의 전쟁에서는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많은 공을 세워 진위장군(振威將軍), 분무장군(奮武將軍) 등 여러 장군직을 역임했습니다. 또 조조가 마초를 공격하러 갔을 때는 조비와 함께 수도를 지키면서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항복해 온 반란군의 잔당 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본디 그들을 모조리 죽이는 게 원칙이자 법도였습니다. 하지만 정욱은 반대하면서 조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항복한 자를 죽이는 건 난세의 원칙입니다. 천하가 혼란할 때는 투항해 온 자들을 용서하지 않아야만 위세를 떨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천하가 대략 안정되었으므로 항복해 오는 자들이 계속 늘어날 것인데, 예전처럼 무작정 죽일 수는 없고 혹 그렇게 한다 해도 위엄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들을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만일 죽이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조조의 의향을) 여쭈어봐야 할 것입니다.”

  과연 조조는 그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정욱의 지혜로움이 다시 한번 증명된 순간이었습니다.




  정욱은 일평생 자신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항상 가장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한 지략가였으며. 군사를 지휘하여 적을 막거나 혹은 공격하는 데 실력을 발휘한 장수이기도 했습니다. 조조가 원정을 떠날 때면 근거지를 지켰던 걸로 보아 보급에도 능했으며, 동시에 무척 신임을 받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담력 또한 대단해서 원소의 십만 대군이 밀고 들어오려 할 때에 고작 칠백 명만으로 견성을 지키면서도 조조가 보내려던 추가 병력 이천 명을 오히려 거절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그럴듯합니다. 어차피 칠백이든 이천이든 간에 원소의 대군을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니, 차라리 병사가 적은 상태로 있어서 원소가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도록 하는 편이 낫다는 거지요. 참으로 탁월한 혜안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유비에 대한 정욱의 예측을 살펴보면 그의 뛰어난 식견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비가 여포의 공격을 받아 서주에서 쫓겨 왔을 때, 정욱은 유비가 남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니니 죽여 버리자고 간언합니다. 조조는 한 사람을 죽여 천하의 인심을 잃을 수는 없다고 거부하지요. 하지만 유비는 황제로부터 밀서를 받은 후 조조의 휘하에서 탈출하여 다시 서주를 차지해 버렸습니다. 아마도 조조는 정욱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고 땅을 치며 후회했을 겁니다. 훗날 조조가 형주를 공격하고 유비가 도망쳤을 때도 다른 이들은 손권이 유비를 죽일 거라 생각했지만 오직 정욱만은 오히려 손권이 유비와 손잡고 조조에게 대항해올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물론 정욱의 예상은 또다시 맞아떨어졌습니다. 


  다만 정욱은 성격이 강직하고 고집이 강해서 남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그가 고향 사람들을 죽여서 인육(人肉)을 보급했다는 괴소문까지 떠돌 정도였지요. 또 예법에 따른 몸가짐을 두고 형정이라는 자와 다툰 끝에 면직이 된 일조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욕심이 없는 것은 정욱의 큰 미덕이었습니다. 특히나 조조가 중원을 평정했을 때는 '족함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는다(知足不辱).'라고 말하며 스스로 병권을 반납하고 칩거에 들어간 적도 있습니다. 물론 조조는 그런 그를 계속해서 아끼고 더욱 무겁게 여겼습니다.  




  정욱은 조비가 황제로 즉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합니다. 이때 나이가 놀랍게도 무려 여든이었습니다. 사실 정욱은 141년(혹은 142년생)으로 조조에게 발탁되었을 때 이미 쉰 살이 넘은 장년이었습니다. 조조보다 열네 살 위였고 유비보다는 스무 살, 제갈량보다는 무려 마흔 살이나 많았지요. 심지어 그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원상과 원담을 공격했을 때는 이미 환갑을 한참이나 넘긴 나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기에 사람들은 그가 그토록 나이가 많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정욱이야말로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 진정한 노익장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그러나 거꾸로 뒤집어 생각해 보죠. 그는 무려 오십 년 동안이나 벼슬을 하지 않았던 겁니다.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유대가 그를 몇 차례나 초빙한 바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시다시피 거부했지요. 정욱은 자신이 원하는 주군을 찾으며 차분히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그는 조조를 만났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내일 당장 죽어도 딱히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말입니다. 누가 봐도 한참 늦은 것 같았지요. 그러나 정욱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욱은 거의 삼십 년 동안이나 자신의 다재다능함을 유감없이 떨쳐 보임으로써 사서에 이름을 똑똑히 새겨 두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감히 한낱 나이 따위를 핑계로 삼아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로 늦은 때가 아님을 정욱은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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