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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Oct 08. 2019

방통,
정반대의 방향성을 제시하다

삼국지의 인물들 17


  방통은 자(字)가 사원(士元)이며 형주 남군 양양현 출신입니다. 연의에서는 얼굴이 못생긴 걸로 유명하지만 정말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어린 시절에는 좀 우둔한 편이어서 딱히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약관의 나이에 사람을 잘 평가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마휘를 찾아갔다지요. 그때 사마휘는 마침 나무 위에 올라가 뽕잎을 따고 있던 중이었는데 사마휘는 나무 위에, 방통은 나무 아래에 있는 채로 온종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사마휘가 방통을 매우 훌륭한 인물이라고 평가해 주었기에 그로부터 차츰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https://brunch.co.kr/@gorgom/30


  이후 방통은 유표 시절에 남군에서 공조(功曹)로 벼슬살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공조란 하급 관원들의 임용을 관장하고 근무실적을 평가하는 인사 담당자였습니다. 그런데 방통은 매번 사람들의 장점을 지나칠 정도로 칭찬했고, 반면 단점을 비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얼마나 칭찬을 남발해 댔던지 당시 사람들이 대체 왜 그러느냐고 괴이쩍게 여길 정도였지요. 


  하지만 방통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의견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지금 천하가 난세이기 때문에 일단 장점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데려다 써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일단 사람들을 모을 수 있고, 또 그렇게 모인 사람들 중 설령 절반이 쭉정이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머지 절반은 건질 수 있다는 거죠. 사람에 따라서 옳다고 볼 수도 있고 그르다고 볼 수도 있는 주장입니다. 여기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조가 적벽에서 패퇴하고 조인이 강릉성에서 도망치자 남군은 손권의 손에 떨어집니다. 본래 남군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던 방통은 그대로 남군태수 주유의 휘하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주유가 죽자 방통은 주유의 주검을 운구하여 동오로 돌아오는 역할을 맡습니다. 당시 시대상에서 장례가 얼마나 중요시되었는지를 감안하면 방통의 지위나 명망이 상당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동오로 간 방통은 전종, 육적, 고소 등 동오의 유력 호족들과 안면을 트고 교분을 맺은 후 돌아옵니다. 그러는 동안 높은 양반들끼리 협상을 통해 남군은 손권으로부터 유비에게 넘어갔지요. 이른바 ‘형주를 빌려준’ 일입니다. 그래서 방통은 졸지에 다시 유비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유표에서 손권을 거쳐 유비라니, 방통의 벼슬살이도 꽤나 파란만장했던 셈입니다. 




  유비는 방통을 종사(從史)로 삼아 뇌양현의 현령 자리를 대행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면직되지요. 방통이 워낙 삼국지연의에서 각색이 많이 된 인물이라 아무래도 연의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는데, 이게 소설 상의 묘사처럼 유비가 방통을 무시해서 촌구석에 처박았고 그에 반발한 방통이 그냥 놀고먹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공조가 현령이 되었으면 승진한 셈이거든요. 물론 뇌양현이 워낙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었기에 연의에서처럼 불만을 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때까지 유비는 방통과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눠본 적이 없었습니다. 방통은 형주 일대는 물론이거니와 동오까지도 명성이 자자하게 퍼진 사람이었습니다만 유비는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명성 따위에 별달리 신경 쓰지 않는 군주였거든요. 그래서 방통이 현령 자리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자 헛된 명성이었다고 여기고 그냥 잘라버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구원투수가 나타납니다. 주유의 뒤를 이어 동오의 병권을 쥐게 된 노숙이었지요. 그는 동맹세력의 군주인 유비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말합니다. 

  “방사원은 고작 둘레 백 리 정도의 작은 땅이나 다스릴 인재가 아닙니다. 마땅히 치중(治中)이나 별가(別駕)에 임명해야만 비로소 그 남다른 재능을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치중(治中)은 간단히 설명해서 주목(州牧)의 보좌관 중 2위입니다. 그리고 별가(別駕)는 1위지요. 즉 형주목을 자처하고 있는 유비의 부하들 중에서 첫째나 둘째 가는 자리를 줘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게다가 제갈량도 나서서 방통을 추천했지요. 그쯤 되자 유비도 슬며시 호기심이 생깁니다. 방통이란 자가 대체 어떤 작자이기에 노숙과 제갈량이라는 양국의 뛰어난 인재들이 입을 합쳐 추천하는가 싶었겠지요. 그래서 유비는 방통을 불러와서 깊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걸 순순히 인정합니다. “방사원은 과연 훌륭한 선비로구나. 내가 그동안 몰랐다!”


  유비는 방통을 형주의 치중종사로 삼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근하게 대하기를 마치 제갈량 대하듯이 했고, 나아가서는 제갈량과 동일한 군사중랑장으로 삼기까지 합니다. 즉 모든 면에서 제갈량과 동등한 대우를 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추후 유비가 익주로 들어갈 때 형주에는 제갈량을 남기고 방통은 자신과 동행하도록 합니다. 




  지금까지 방통은 평생 행정 업무만 맡아보았었지요. 하지만 유비를 수행하면서부터 이른바 모사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방통은 본격적으로 의견을 내놓기 시작하는데 놀랍게도 하나같이 몹시 급진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유비가 유장과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방통은 대뜸 주장합니다. 지금 바로 유장을 사로잡고 진군해서 익주를 차지하자고요. 이 의견은 유비의 반대로 인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만, 방통의 화끈하고도 직선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 유비와 유장의 사이가 틀어졌을 때에도 방통은 다시 세 가지 계책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가 상계(上計)로 꼽은 건 정예병을 뽑아 즉시 성도로 진격하여 유장을 습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최단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적의 우두머리를 치자는 것이니, 예전에 그 자신이 제안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과격한 방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이번에도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가 채택한 건 방통의 중계(中計)였습니다. 즉 먼저 양회와 고패를 제거하고 이후 주위를 평정하면서 성도로 나아가자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논의를 보면서 유비가 방통에 비해 신중한 편이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단지 표면적인 해석일 뿐이지요. 조금 더 본질적인 부분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비는 본래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우선시했습니다. 그는 영토에 눈이 멀어 물불 가리지 않았던 당시의 일반적인 군웅들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땅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얻고자 했고, 영토 내의 호족과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당시에는 짐승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던 이민족들에게조차 널리 은혜를 베풀면서 호의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유비라는 이름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천하에 각인되었지요. 서주에서는 미축을 비롯한 호족들이 앞장서서 그를 주목으로 추대하였으며, 형주에서는 무려 십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조조를 피해 그를 따라갔고, 익주의 유력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끌어들일 정도였습니다. 


  그렇기에 유비는 처음부터 급박하게 유장을 공격할 마음이 없었을 겁니다. 그보다는 시간을 들여가며 천천히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을 테지요. 그래서 장로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북진했으면서도, 막상 장로를 공격하는 대신 오히려 은덕을 베풀면서 익주 사람들을 천천히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다소 과장되게 말하자면 익주가 스스로 자신에게 바쳐지기를 원한 거지요. 그건 비록 느리지만 그만큼 뒤탈이 없고 안정적인 방식이었습니다. 


  반면 방통의 방향성은 주군인 유비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일단 눈에 보이는 성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유하자면 병든 사람에게 필요한 건 충분한 휴식과 장기적인 체력 단련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타나는 극약처방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리고 일단 확실한 성과를 내면 그 후에 뒤따라오는 부작용쯤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과거에 인재들을 지나칠 정도로 칭찬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찬밥 더운밥 가릴 것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인재를 발탁하여 일단 머릿수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그렇게 인재를 모은 후에야 비로소 옥석을 가려도 늦지 않는다는 심산이었던 거죠. 


  그렇기에 유비가 보기에 방통처럼 과격한 방식은, 당장은 효율적일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이나 방통의 계책을 물리친 것이죠. 반면 방통이 보기에 유비의 온건한 방식은 지나치게 느리고 답답해서 이 난세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번 그토록 급진적인 의견을 낸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의 신뢰와 믿음은 옅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비와 방통의 견해 차이는 상호 간의 의견이 충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보완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때로는 말다툼이 험악하게 치닫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유비의 솔직함과 방통의 대범함 덕택에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방통은 제갈량에 뒤이어 유비의 또 다른 한 팔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신중한 제갈량과 급진적인 방통은 서로를 보조해줄 수 있는 좋은 조합이기도 했지요. 유비는 바야흐로 와룡(臥龍)과 봉추(鳳雛)를 양쪽에 거느리고 하늘로 날아오를 찰나였습니다. 


  그러나 봉황은 미처 날아오르기도 전에 날개가 꺾이고 맙니다. 




  유비가 유장의 부하들을 연달아 꺾고, 뒤이어 형주에서 제갈량이 이끄는 지원군마저 들어오자 유장에게 남은 건 오직 최후의 방어선인 낙성뿐이었습니다. 유장의 아들 유순이 지휘하는 수비군은 유비의 맹공을 근 1년 동안이나 버텨냈지요. 방통은 이곳에서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성을 공격하던 도중,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맞고 그만 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36세로 몹시 이른 죽음이었습니다. 


  유비는 방통의 죽음을 애석해하여 눈물마저 흘렸다고 합니다. 그건 단지 방통의 재주가 안타까웠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본래 윗사람들이란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도 기탄없이 말하라고 입으로만 떠들 뿐, 누군가가 실제로 그렇게 하면 오히려 벌컥 화를 낸다는 건 장장 수천 년에 걸친 유구한 역사가 이미 증명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방통은 항상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대범하게 들이밀었습니다. 그게 주군의 생각과는 전혀 다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렇기에 유비에게 있어 방통은 더욱더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이미 봉황은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이로써 유비는 자신과 가장 반대되는 성향을 지닌 뛰어난 인재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제갈량 역시도 자신과 함께 유비를 모시며 대업을 이룰 만한 인물을 잃고 말았지요. 이는 비단 방통 한 사람만의 죽음이 아니라 유비 세력 전체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영향은 유비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지속되었지요. 


  만일 방통이 살아 있었더라면, 그래서 형주에서 관우를 도왔더라면, 유비를 보좌하여 이릉으로 나아갔더라면, 제갈량과 함께 협력하여 북벌을 도모하였다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역사에 만일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때때로 그런 상상을 해보곤 합니다. 그만큼 방통이라는 인물이 비범했던 까닭이며 동시에 유비 사후의 촉한에 또 다른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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