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곰 Oct 21. 2019

서서,
밑바닥에서 출발한 자의 노력

삼국지의 인물들 22

  서서의 자(字)는 원직(元直)이며 예주 영천군 출신입니다. 원래 이름은 서복(福)이었습니다. 시중의 삼국지 관련 책에는 서서의 본명이 선복 혹은 단복이라고 적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삼국지연의를 지은 나본 선생이 한자를 잘못 해석한 바람에 생겨난 잘못입니다. 단가(單家) 출신으로 되어 있는 사서의 기록에서 단(單)을 성으로 착각한 거죠. 단가란 한미한 집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서서는 어려서부터 공부 대신에 검술을 익혔고 임협(任俠)을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써 놓으니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시장바닥에서 패거리를 지어 칼 휘두르고 다니던 건달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다 다른 이의 원한을 대신 복수해주고 도망치다가 관리들에게 붙잡히는 지경에 이릅니다. 하지만 서서가 소속된 일당의 끗발이 꽤나 대단했던지, 그가 누구인지 나서서 증언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관리들은 범죄자를 붙잡아 놓고도 그 인적사항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심지어 그 패거리들은 관리들을 습격하여 잡혀 있던 서서를 탈취해 달아나기까지 합니다. 아주 무법천지였던 셈이지요. 


  서서의 삶은 이렇게 아주 밑바닥 인생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한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자 그도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무기를 집어던지고 대신 책을 들어 뒤늦은 공부를 시작했지요.  




  서서가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유생들이 모두 그를 꺼려하여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날건달에 범죄자 출신이라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있었던 탓입니다. 그러나 서서는 오히려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행동하였습니다. 또 아침마다 가장 먼저 일어나서 책을 폈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혼자 교실을 청소하는 등 말보다 행동으로 갱생의 의지를 드러내 보였지요. 그래서 마침내 같은 영천군 출신인 석도라는 자와 친구가 됩니다. 


  천하가 전란에 휩싸이자 서서는 석도와 함께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갑니다. 형주에 머무르면서 맹건, 최균, 상랑 등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지요. 맹건과 최균은 연의에서 본명 대신 맹공위와 최주평이라는 자로 등장하기에 익숙하실 겁니다. 그리고 특히 깊은 친분을 맺은 이가 있는데 바로 제갈량입니다. 비록 서서가 제갈량보다 열 살 이상 많았지만 두 사람은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을 보였습니다. 제갈량이 평소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빗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헛소리를 한다고 무시했지만 오직 서서와 최균 두 사람만은 그런 제갈량을 인정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서서는 신야에 주둔해 있던 유비를 찾아가 그 휘하에 듭니다. 아마도 유비가 주군으로 섬길 만한 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유비 또한 그를 중히 여겼다고 기록에 남아 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서서는 유비에게 말합니다. 

  “제갈공명은 누워 있는 용이라 할 만한 사람입니다. 장군께서 그를 만나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항상 인재를 갈구했던 유비는 반색하며 말했지요. 

  “그대가 가서 데리고 와 주지 않겠소?”

  그런데 서서의 대답이 뜻밖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찾아가 만날 수는 있어도 스스로 몸을 굽혀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 몸을 낮추어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지금은 유표에게 빌붙어 사는 객장 신세라지만 한나라의 좌장군(左將軍)에 의성정후(宜城亭侯)요, 당금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유비입니다. 그런 유비더러 누구인지도 모를 유생을 찾아가라는 서서의 발언은 참으로 당황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비의 행동은 더욱 놀라웠습니다. 그는 서서가 말한 데로 직접 제갈량을 찾아갑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연달아서 말입니다. 그만큼 인재를 갈구한 것이고, 동시에 그만큼 서서의 안목을 믿었던 것이겠지요. 이후  마침내 제갈량을 얻는 과정은 여러분이 모두 잘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 오자 유비는 남쪽으로 도망칩니다. 신야에서 번성을 거쳐 당양 장판까지 내려갔다가 도중에 추격대에게 따라 잡히지요. 유비는 처자마저 버리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유비조차 가족을 잃는 꼴을 당했을진대 다른 부하들은 오죽했을까요. 무수한 이들이 조조에게 사로잡혔는데 여기에는 서서의 노모 또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서서는 유비에게 나아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작별을 고합니다. 

  “본래 장군과 함께 제왕의 업적을 도모하고자 한 것은 이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이 드신 어머님을 잃어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더 이상은 도움을 드릴 수 없게 되었으니 감히 작별을 청합니다.”


  그렇게 서서는 유비를 떠나 조조에게로 갑니다. 이때 친구인 석도도 함께 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충(忠)이 효(孝)보다 우선시 되는 후대와는 달리 당대의 인물들은 이러한 선택에 대해 딱히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강유는 상황이 어쩔 수 없게 되어 촉한에 귀순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기조차 했죠. 그러니 서서의 이런 선택도 크게 이상한 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조차 흔쾌히 서서를 보내준 유비의 배포도 인정해 주어야겠지요. 




  비록 출신이 한미하고 지위 또한 보잘것없었지만, 서서의 재능은 결국 위나라에서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점차 승진하여 조비 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우중랑장(右中郎將)에 어사중승(御史中丞)까지 오릅니다. 우중랑장은 황제를 모시는 일을 담당하는 광록훈 휘하에 있는 비2000석 관직이고, 어사중승은 관리와 백성들을 감찰하는 직책입니다. 상당히 높은 고위직이지요. 그러나 제갈량은 서서의 벼슬을 듣고는 오히려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위나라에는 뛰어난 선비가 참으로 많구나! (서서와 석도) 두 사람이 고작 저 정도로 쓰인단 말인가!”


  제갈량은 그만큼 서서를 진심으로 높이 여겼습니다. 심지어 승상이 된 후에도 휘하의 관리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했을 정도였지요. 

  “모름지기 관리들은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한데 모으고 유익한 충언을 널리 받아들여야 합니다. 서로 작은 의견 충돌조차 피하려고 하여 자유로운 토론을 거리낀다며 나라의 손해가 클 것입니다. 토론을 통해 서로를 뜻을 공유하면 이는 마치 해진 짚신을 버리고 구슬과 옥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란 참으로 어려우니 이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직 서원직만이 이렇게 처신하면서 미혹되지 아니했습니다.”


  그의 발언으로 미루어보건대 서서는 여러 사람들과 의견을 교류하면서 좋은 방안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걸로 보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때로는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고, 혹은 말다툼조차 마다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결국은 나라에 이로움을 가져다주었으니 결코 세 치 혀만 놀리는 속 빈 강정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오직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를 깎아내리기에만 급급한 이른바 인터넷 워리어가 범람하는 시대에, 서서의 이러한 행동은 자못 본받을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서서의 가장 큰 미덕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노력에 있습니다.


  요즘은 노력의 가치가 꽤나 폄하되는 세상이지요. 그러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건달 노릇이나 하면서 심지어 남을 대신해서 사람을 해치기까지 하던 밑바닥 인생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국가의 고위직에까지 오른 서서의 노력은 결코 함부로 깎아내릴 수 없습니다. 심지어 조비가 건국한 위나라는 가문과 집안의 힘이 무척이나 중시된 국가였는데도 서서는 오직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그런 제약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조차도 그런 서서를 끝까지 존경한 게 아니었을까요.


  그렇기에 저 또한 서서를 좋아합니다. 노력이란 단어 자체가 비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린 이 시대에, 말이 아닌 행동으로 옛 미덕의 가치를 웅변해주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