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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Nov 22. 2019

조위의 인사제도(5) : 구품관인법

더 깊게 들여다보는 삼국지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은 조위(曹魏), 즉 조씨 위나라가 건국되자마자 도입된 새로운 인사 제도입니다. 진군이라는 사람이 헌책하고 황제 조비가 채택했지요. 


   어떤 분들은 구품관인법을 도입하여 조비가 스스로 위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고 주장합니다. 호족과 대가문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화된 바람에 그들이 귀족화하면서 황권을 약화시켰다는 겁니다. 저도 절반쯤은 동의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니까요. 그럼 나머지 절반이 무엇인가 하면, 저는 구품관인법이 조비 자신에게도 이득도 많이 가져다주었다고 봅니다. 조비가 얼빠진 놈이라서 아무 생각 없이 나라를 말아먹은 건 아니란 뜻입니다. 


   그럼 구품관인법이 대체 어떤 제도인지부터를 먼저 설명해야겠네요. 


   우선 벼슬아치(官人)들을 아홉 단계의 품(九品)으로 나눕니다. 제일 높은 게 1품. 제일 낮은 게 9품입니다. 원래 봉록(연봉)을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나뉘던 벼슬의 높낮이를 명료하게 재정비한 거죠. 이것만 해도 꽤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벼슬이 몇 품이냐에 따라 직관적으로 위계질서를 파악할 수 있게 되니 관료제가 튼튼해지거든요. 


[참고자료] https://brunch.co.kr/@gorgom/6 


   그리고 기존의 중앙관리 중 존경받는 사람을 선정해서 출신지의 중정(中正)으로 임명합니다. 이 사람들의 역할은 해당 지역의 인재를 살펴 중앙정부에 추천하는 것이었죠. 게다가 이 사람들에게는 인재를 추천할 때 품계를 매길 자격도 함께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향품(鄕品)이라 하는데, 말하자면 ‘이 사람은 이 품계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인물입니다’라는 품질보증서 같은 겁니다. 


   그렇게 중정의 추천을 받은 중앙정부에서는 그 사람을 임명합니다. 처음에는 향품보다 4단계 낮은 벼슬을 주지요. 그리고 일을 시켜 봐서 잘하면 향품의 등급까지 승진시켜 주었습니다. 


   자. 이 제도의 이론적인 장점은 이렇습니다. 일단 중앙정부의 관리가 지방으로 가서 관리를 추천하니 중앙정부의 의도와 지방의 여론을 함께 반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수한 사람에게는 향품을 높게 주고 능력이 떨어지는 자에게는 낮게 주어 제각기 능력에 따라 사람을 쓸 수 있게 했지요. 


   조금 더 파고 들어가면 이건 새로 건국된 위나라가 지방 호족들에게 주는 메시지였습니다. 새로운 나라에 반항하지 말고 협조하면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제도적으로 보장해 준 겁니다. 중정은 중앙정부가 파견한 관료죠. 중정에게 잘 보이면, 즉 중앙정부에 잘 보이면 추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한나라 시절과는 다르게 높은 향품을 받으면 처음부터 높은 지위를 배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로써 지방의 호족이 중정을 통해 중앙 정계로 나아가 빠르게 출세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리게 된 겁니다. 물론 이 중정의 임명권은 황제가 쥐고 있었죠. 


   즉 구품관인법을 통해 조비는 지방의 반란 가능성을 낮출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황권을 위협하는 그들을 오히려 중앙정부로 편입시켜 자신의 수하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아주 교과서적인 중앙집권 강화입니다. 조비가 그토록 서둘러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나라를 조속히 안정시켜야 한다는 최우선적인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리고 부가적으로는 지방관의 힘을 감소시키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후한 말기에 세력을 이룬 군웅들은 대부분 태수나 자사 같은 지방관 출신이었습니다. 즉 지방관 또한 잠재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인사추천권을 빼내어 중정에게 주었기에 위나라 체제 하에서 지방관들의 영향력이 감소될 수밖에 없었지요. 


   조비의 의도는 상당히 달성되었습니다. 조비는 중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방을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지방의 호족들은 구품관인법을 통해 벼슬을 받아 자꾸만 중앙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점차 예전처럼 지역에서 대장 노릇하는 것보다 수도로 가서 고위공무원이 되는 게 나은 상황이 되어 갑니다. 왜냐고요? 중정이 중앙관리 출신인 이상, 일단 내가 중앙으로 가 고위직이 되어야만 중정이 되어 또다시 자기 가문이나 친한 사람들을 추천해 수 있게 되니까요! 바야흐로 지방이 아니라 중앙이 권력의 핵심이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겁니다. 


   자. 이제 대충 얼개가 이해 가시죠? 다시 한번 요약하겠습니다. 1)조비는 황제가 되었습니다. 2)하지만 절차적 정당성이 부족해서 반란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죠. 그래서 3-1)친족을 통해 군사력을 장악하고 3-2)구품관인법을 통해 지방호족을 중앙 정계로 끌어들임으로써 4)자신의 황권을 공고히 했습니다. 요약 끝. 


   이를 통해 위나라는 막 건립된 신생국가치고는 매우 빠르게 안정화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태평성대라고까지 표현할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후 남북조와 오호십육국 시대를 관통하며 명멸하였던 수많은 막장 국가들에 비하면 훨씬 나았지요. 그리고 한나라가 수백 년간 존속되어 오며 쌓아 온 명분의 무게를 감안한다면, 또한 중간에 있었던 왕망의 실패 사례까지 고려한다면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여 조조가 만들기 시작한 체제는 자식인 조비 대에 이르러 마침내 완성됩니다. 황실은 두 개의 기둥으로 떠받쳐졌죠. 하나는 친족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이었고, 또 하나는 구품관인법을 통한 지방호족 포섭이었습니다. 무력을 통한 협박과 벼슬을 통한 회유의 병행이라고 설명해도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 해서 구품관인법의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일단 구품관인법은 추천제입니다. 즉 한나라 시절 향거리선제(鄕擧里選制)가 가지고 있던 추천제의 단점 대부분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습니다. 평가 기준이 불명확하다거나, 실무 능력이 뛰어난 인재를 가려내기 어렵다거나 하는 단점들을 모두요. 그러나 그건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습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중정의 권한이 지나치게 컸다는 데 있었습니다. 


   물론 지방까지 중앙정부의 영향력을 투사하기 위해서는 중정의 권한이 강해져야 하는 건 필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중정들은 실로 어마어마한 권력을 지니게 됩니다. 인재 추천권뿐만 아니라 향품을 매기는 권한까지 있다 보니 중정에게 잘 보이면 고위관직으로 향하는 프리패스가 발급되고, 중정에게 밉보이면 아예 추천을 못 받거나 혹은 받는다 해도 하급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구품관인법은 숫제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라고까지 불릴 지경이었죠. 


   자. 그럼 중정에게 잘 보인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제도의 원래 취지대로 재야에 묻힌 능력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유재시거, 조비의 아버지 조조가 그토록 갈망하던 능력 있는 인재들이 이 구품관인법을 통해 추천되어 고위직에 발탁되었을까요? 


   그럴 리 없죠. 


   구품관인법 하에서 높은 향품으로 천거된 사람도 결국은 지방에 기반을 둔 명문거족 출신들이었습니다. 한나라 시절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가문의 힘과 뇌물을 바탕으로 높은 향품을 독차지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중정 자체부터가 그 지역의 명문가 출신이었죠. 애당초 그놈이 그놈이었다는 뜻입니다. 또 한나라 시절의 무재나 효렴에는 추천받은 사람이 사고를 치면 추천자까지 한꺼번에 연대 처벌하는 제도가 있어 말도 안 되는 추천의 남발을 제도적으로 막았습니다. 그러나 구품관인법 하에서는 그러한 제한조차도 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결국 중정과 명문대가는 한통속이 되어 카르텔을 형성합니다. 이로써 필연적으로 몇몇 유력 가문이 고위직을 독점하는 현상이 가속화되지요. 예전에는 지방에서 큰소리치던 호족들이 이제는 수도로 와서 가문의 영향력을 쭉쭉 키워나가게 됩니다. 가문의 세력을 키우고, 다른 가문들과 연합하며, 몇몇 명문대가를 중심으로 엄청난 세력을 구축해 갑니다. 이들을 후대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습니다. 귀족(貴族)이라고요. 이른바 귀족정치 시대의 개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비 대에는 이 제도가 그럭저럭 잘 돌아갑니다. 어쨌거나 조비는 자신의 황권을 튼튼히 하는 동시에 나라를 안정시킨다는 명확한 목표를 달성했죠. 그 과정에서 발생한 귀족들의 대두라는 부작용조차도 조비로서는 충분히 감내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자신은 군권을 쥐고 있었고, 중정을 임명하는 권한 또한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귀족들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칭찬이 무색하게도, 조씨 황실은 조비가 죽은 뒤 불과 삼십 년도 지나기 전에 박살이 나고 맙니다. 그 발단은 조비의 때 이른 죽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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