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게 들여다보는 삼국지
조예에게 있어 사마의는 그나마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사마의는 선대 황제인 조비와도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였을 뿐더러 탁고대신이기도 했습니다. 조비는 그를 무척이나 신뢰하여 스스로 친정(親征)을 나갈 때 후방을 맡겼고, 심지어는 ‘짐이 동쪽에 있을 때 그대는 서쪽을 맡고 짐이 서쪽에 있을 때 그대는 동쪽을 맡으시오’라고 말할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렇기에 조예가 즉위한 시점에서 이미 사마의는 군부의 최고위급 인사였습니다.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승진했고, 독형예이주제군사(督荊豫二州諸軍事)로서 두 주(州)의 군사들을 총괄할 권한을 받았습니다. 이후 대장군(大將軍)에까지 오르죠.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조휴의 오 정벌과 조진의 촉 정벌에서도 별도로 한 갈래의 군사를 이끌고 조공(助攻)을 담당했습니다. 친족 장수에게 유능한 보조자를 붙여주는 게 조조 때부터 내려온 유구한 전통임을 감안하자면, 사마의는 지위뿐만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이미 위나라에서 최고 수준의 지휘관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조예 시대에 위나라에 있어 가장 큰 위협은 제갈량이 이끄는 촉이었습니다. 231년에 대촉 전선을 담당하던 조진이 병들자 조예는 남쪽에 있던 사마의를 불러들여 이렇게 말합니다.
“서쪽의 일은 그대가 아니면 맡길 만한 자가 없소.”
그렇게 사마의는 도독옹량이주제군사(都督雍梁二州諸軍事)로 제갈량과 맞상대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사마의는 남들이 감히 따를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실적을 쌓은 자타공인 군부의 최고위급 인사였죠.
그런데 제갈량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위나라의 가장 큰 위협이 사라지자, 이듬해인 235년에 조예는 대장군 사마의를 태위(太尉)로 임명하고 녹읍을 늘려줍니다.
이 조치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태위는 대사마나 대장군과 마찬가지로 1품 벼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두 벼슬과는 달리, 태위는 비록 명예는 드높았으나 직접 군사를 거느리는 실권이 없는 직위였습니다. 이전에 태위를 역임한 이들이 가후, 종요, 화흠 등의 문관임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그렇기에 아무리 녹읍을 늘려 주었다지만 이건 어찌 보면 강등이나 마찬가지인 조치였습니다.
그러면 조예는 사마의를 경계했던 것일까요? 무한대에 가까운 믿음을 보였던 아버지 조비와는 생각이 달랐던 걸까요? 하기야 황제가 실적과 명성이 높은 신하를 경계하는 건 어쩌면 숙명과도 같은 것이지요.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는 것이야말로(狡兎死走狗烹) 황권의 안정을 위해 한고제 유방 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유구한 전통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얄팍한 해석이 참으로 민망하게도, 사마의는 여전히 군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마의는 태위가 되었는데도 수도 낙양으로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장안에 주둔해 있었거든요. 마대의 공격을 막아내기도 하고, 저족들을 견제하기도 했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앞뒤가 안 맞습니다. 사마의를 견제하려 했다면 그를 무조건 수도로 불러들여 군사들을 빼앗아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신뢰했다면 대장군에 놓아두거나 오히려 대사마로 승진시켜야 했습니다. 왜 둘 다 아니었을까요?
배경지식 하나와 함께 그 의도를 짐작해 보지요. 위나라 동북쪽 멀~리 요동에 실질적인 독립세력이었던 공손씨 일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데다 세력 또한 강했습니다. 여담이지만 고구려와도 꽤나 치고받았더랬죠. 조조나 조비는 공손씨들을 정벌하는 대신 적당히 벼슬을 주어 회유하고 달래려 했습니다. 조조는 공손강을 좌장군으로 임명했고, 조비는 즉위 후 공손강의 동생 공손공을 거기장군으로 삼았습니다. 이후 공손공의 조카 공손연이 그 자리를 빼앗자 조예는 그를 양열장군으로 임명했다가 다시 거기장군으로 올립니다. 그런데 공손연은 위와 오 사이에서 잔뜩 간을 보다가 결국 손권의 사신을 죽이고 위에 붙습니다. 조예는 공손연을 무려 대사마로 삼고 낙랑공에 봉함으로써 그에 보답하죠. 이게 233년의 일입니다.
저는 공손연이 대사마에 임명된 시점에서 대사마가 명예직으로 전락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입조하지도 않는 공손연에게 정말로 군사들을 총지휘할 권한을 준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요. 그러면 대사마를 대체할 자리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원래 명예직에 가까웠던 태위였던 겁니다. 즉 태위가 기존의 대사마를 대신하게 된 거지요.
이런 추측대로라면 결론은 아주 명료해집니다. 조예는 조비와 마찬가지로 사마의를 엄청나게 신뢰했습니다. 자신의 친족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욱 더요.
237년. 더 이상 공손씨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위나라는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명하려 공손연을 토벌하게 합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패했지요. 공손연은 결국 반란을 일으켜 연왕(燕王)을 자칭합니다. 조예의 선택은 당연히 사마의를 불러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조예는 말합니다. “이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하기에 굳이 그대를 번거롭게 하였소.”
사마의는 군사 4만 명에 기한 1년을 제시합니다. 조예는 승낙하죠. 조정에서는 난색을 표했습니다. 그 머나먼 요동까지 4만 명이나 보내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본질적으로 돈으로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조예는 고개를 흔듭니다. 반드시 4만 명을 주라고 강경하게 지시했죠. 이 사실로 보아도 조예의 머릿속에 ‘사마의가 이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키면 어쩌지?’라는 의문은 아예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까지 조예는 사마의에게 아낌없는 신뢰를 보였습니다. 젊은 친족들을 낙하산으로 앉혀 쾌속 진급시켜 황실의 보위세력으로 삼으면서도, 동시에 사마의를 향해 보여주는 이 한없는 믿음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요?
저는 조예가 사마의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상징적인 의미로 말입니다. 조비는 죽기 직전까지 조예를 후계자로 지정하지 않았죠. 그리고 조예의 입장에서 아버지 조비는 자기 친어머니를 죽이고 새어머니를 데려온 인물입니다. 과연 두 사람 사이에 부자간의 정 같은 게 있기는 했을까요? 차라리 증오와 미움의 비중이 훨씬 높았을 걸로 보입니다.
그런 조예에게 있어 사마의는 그가 기댈 수 있는 기둥이 아니었을까요. 나라의 중신이었고 보정대신으로 자신을 탁고한 사람입니다. 나이는 아버지보다 몇 살 더 많았죠.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동서남북을 주유하며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마치 아이가 아버지에게 의지하듯 조예가 그런 사마의에게 심리적으로 의지한 건 아닌지, 저는 그렇게 혼자 생각해 봅니다. 이후 조예가 죽음에 이르러 하는 행동을 살펴보면 그런 심리가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나기도 해요.
게다가 사마의는 따지고 보면 조예의 먼 인척이기도 했습니다. 사마의의 큰아들 사마사는 하후휘와 결혼했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하후상이었고 어머니는 조진의 여동생이었습니다. 조비의 삼대장이라 할 만한 조진, 조휴, 하후상 중 둘의 핏줄을 이은 겁니다. 그런 여인이 사마사와 결혼함으로 인해 사마의는 조씨 황실과도 간접적으로나마 엮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조예는 사마의를 내심 친족처럼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반대로 사마의가 조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예 생전에 사마의는,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충직한 신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중앙 정계의 모든 귀족 가운데서도 가장 강성한 세력을 지닌 귀족이기도 했지요. 조진과 조휴가 세상을 떠난 시점에서 그는 황실을 보위하는 가장 큰 버팀목인 동시에 황실에 있어 가장 큰 잠재적 위협이었습니다.
사마의는 공손연을 깔끔하게 토벌합니다. 자신의 장담대로 정확하게 1년 걸렸습니다. 238년 1월에 출정해서 239년 1월에 개선했거든요. 그런데 놀랍게도 조예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것도 매우 위중한 상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