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홍규,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를 읽고.
손홍규 작가의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2018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처음 읽었다. 그때는 막연하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은 게 전부였던 것 같다. 최근 그의 작품집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를 구입하고 목차에서 해당 제목을 보았을 때, 마치 잊고 지낸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하지만, 반가움과는 별개로 그의 글은 이해하는 데 굉장히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요구했다. 손홍규 작가의 문체는 사뭇 건조하다. 요즘 작가들처럼 ‘보기에 예쁜 글’과는 거리가 멀다. 건조한 문체로 삶의 무게를 깊이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해 후기를 쓰는 일이 꽤 고단한 작업이었음을, 기분 좋은 고백으로 남겨둔다.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한마디로 ‘변화무쌍’하다. 분량으로 보면 중편인데, 그 안에 장편 이상의 변주가 심어져 있다. 작가는 소설을 1,2,3 세 부분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우선 1에서 3으로 진행할수록 관념적인 문체에서 리얼리즘으로 변화해 간다. 게다가 시간의 흐름은 3에서 1로 진행된다. 그리고 가장 특이하면서도 내가 감탄했던 부분은 화자가 교묘하게 바뀌어가는 것인데, 바뀌는 지점을 정확히 찾아보느라 다시 읽어야만 했다.
전체적으로는 인간 군상의 모습들을 등장인물들이 반영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인생의 사람들이라면 한 구석쯤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눠보자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불한당과 상장(喪章)을 한 청년
작품은 한 술집에서 불한당들이 막 들어서는 청년을 주목하면서 시작된다. 어느 누구도 신원이 명확하지 않다. 이는 불한당도, 상중인 청년도 모두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작가의 의도이다. 상징적인 인물을 등장시켜서 관념적으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철없던 젊은 시절의 객기를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철부지이거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다가도 슬픔에 빠진 청년을 보면 모두들 한 번쯤은 살아온 날을, 살아갈 날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또한 우리도 언제든 살아가면서 마냥 기쁠 수만은 없음을 깨닫는다.
(2) ‘그(남편)’의 이야기
불한당과 청년이 술을 마시고, 슬퍼하는 모습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 이 역시 우리의 모습이다. 작가는 중년의 남성들을 ‘그’를 통해 대변하고 있다. 그에겐 치매에 걸린 노모와 그런 노모를 어려운 형편에도 굳이 모시는 여동생이 있다. 가족이란 이름의 ‘굴레’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과묵한 그는 많은 괴로움을 짊어지고 산다. 주기적으로 돈을 융통해 달라는 여동생, 집에선 음식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아내, 집 나간 아들, 따로 방을 얻어 사는 딸. 갈가리 찢어진 가족이란 허물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 중이다.
가슴 통증으로 쓰러진 그를 아내는 보고 돌아서 현관을 열고 나가버린다. 완전히 틀어져버린 가족 이전의 부부 사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그는 과거, 아내를 처음 만날 당시를 떠올려 본다. 작가는 아내에게 사랑을 느낀 회상 장면을 친절하게 3부에 배치해 두었다.
(3) ‘그(아내)’의 이야기
그는 단단히 고장 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에서도 그러했듯 이 부부의 어느 쪽이든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병원 식당에서 일을 하며 겪는 부조리한 현실, 해체 직전의 가족, 흔히 딸은 엄마에게 자식이자 친구라고 하지만, 그의 딸은 엄마에게 과거 모질게 한 일들을 호되게 추궁한다. 가끔 치매 걸려 아무런 반응도 없는 시모에게 하소연하는 게 일종의 탈출구였으나, 그마저도 시누이가 모시고 가버렸다. 곧 그는 집에서 음식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의 구역질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단순한 알레르기가 아니라 삶의 전환점 같다는 걸. (중략) 다른 무언가가 생겨났다는 뜻이겠지. 나는 무얼 잉태해 버린 걸까. 내가 이 나이에 잉태할 수 있는 건 분노 말고 뭐가 더 있을까.
내 안의 분노가 생존의 기본 값인 '허기'와 '식사'라는 기능마저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직장에서 농성 중인 그를 도와준 남편에게 아들을 데려오라 악다구니를 써보지만, 그도 안다. 둘 다 한계임을. 그리고 그 역시 남편이 처음 방문한 날을 회상할 것이다.
마지막 3에 이르러서는 남편이 아내의 자취방에 처음으로 방문한 날을 이야기한다. 아내는 모든 것을 한 개씩만 갖고 있었고, 그런 집에 가서 남편은 아내가 차려준 밥상을 받는다. 하나뿐인 그릇과 한 벌뿐인 수저로. 아내는 말없이 식사하는 남편을 지켜볼 뿐이다. 남편이 돌아가고서 설거지를 하던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마치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이후의 자신의 인생을 미리 예감이라도 한 듯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보면 다수의 그의 영화는 ‘가족의 해체와 재구성’을 이야기한다. 깨어진 도자기 조각들을 어떻게든 이어 붙인다. 간혹 조각이 아주 작게 깨지거나 아예 가루로 바스러진 부분들이 있으면 도자기는 완벽히 원상태로 복원되긴 어렵다. 하지만 그 틈에 어떤 보충 재료들을 메워서라도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는 게 고레에다 히로카즈 식이다. 손홍규 작가의 이 작품은 어떻게든 흩어지지 않으려 붙잡고 있지만, 이미 군데군데 구멍이 난 ‘쓸모 없어진’ 도자기 같은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리얼리티로 따지자면 확률적으로 손홍규 작가의 가족이 더 많을 것이다.
작중에서 여동생을 만나고 돌아가던 그의 앞에 전봇대에 피투성이로 쓰러진 청년을 병원으로 업고 데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청년은 분노에 찬 것인지, 아니면 복수를 향한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업힌 그에게 그(남편)이 말을 건넨다.
성공했니? 아니요. 억울하니? 아니요. 그럼 이제 놓아라. ……그의 발아래로 돌멩이가 툭 떨어졌다.
청년은 결국 거세게 저항하고 살아내려는 ‘그’와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아직 펴지 못한 내 주먹 안에는 과연 무엇이 쥐여 있는지, 혹은 무엇을 놓지 못하고 있는지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