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워버린 편지가 읽고 싶어질 때

앨리스 먼로의 「런어웨이」

by 허무

윌리엄 포크너의 글이 대륙의 끓어오르는 피를 상징한다면, 앨리스 먼로는 그 피가 식어가는 과정을 집요하게 주시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중 유일하게 '단편'만으로 정점에 선 그녀의 세계는 그렇게 서늘하게 시작된다.


가로막힌 달아나기: 가스라이팅과 애증 사이


소설 「런어웨이」는 가스라이팅의 구체적 사례를 보여준다. 주인공 칼라는 남편 클라크의 심리적 지배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관계를 지탱하는 동력이 '거짓'이라는 데 있다. 칼라는 죽어가는 노인의 성추행 이야기를 지어내 남편에게 바치고, 남편은 그 분노를 동력 삼아 칼라를 소유한다.


칼라가 도망치는 버스 안에서 깨달은 사실은 끔찍하다. 클라크가 없는 미래에는 '나 자신'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클라크는 그녀에게 고통인 동시에 생동감 넘치는 도전이었고, 그녀의 인생 그 자체였다. 이 지독한 애증이 그녀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낸다.


세 가지 섬뜩한 징후들

이 소설에는 서늘하다 못해 섬뜩함이 느껴지는 세 가지 지점이 있다.


말라버린 물웅덩이 : 가출 전, 웅덩이에 대고 코를 풀던 칼라의 천진함은 돌아온 후 증발해 버린다. 웅덩이가 흙먼지가 되었을 때, 이전의 칼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불가역의 소각(Should have) : 이웃 실비아의 '다 태워버릴걸'과 칼라의 '진작 그렇게 할 것을'은 원문에서 똑같이 'should have'로 묘사된다. 흔적을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두 여자의 말은 되돌릴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을 관통한다.

사라진 염소 '플로러' : 칼라의 분신이자 매개체인 염소 플로러의 등장은 기묘하다.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하는 듯 보였던 존재는 결국 '외면하고 싶은 진실'의 형상이 되어 사라진다.


당신이 태워버린 편지는 안녕한가

작가는 칼라가 집으로 돌아온 뒤의 일상을 섬세하게 가위질하여 보여준다. 영화처럼 교차하는 시점들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타버린 편지의 재가 변기 속으로 사라지듯, 칼라의 자유 또한 그렇게 안개 속으로 침잠한 것일까.

앨리스 먼로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진작 태워버렸어야 했다고 믿는 그 '편지'는 정말 안녕한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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