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 영화평론가와 연관 없음. 티 한 끝도 없음. 이슬아 님도 마찬가지
일간 이슬아를 쓰는 작가를 알고 계신가요. 하루에 한 번씩 계속 글을 써 내려가는 사람이지요. 이제는 어느덧 유명세 탓에 일간 이슬아를 중단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녀가 2018년부터 이런 이벤트를 진행했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그러면서 그녀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어요. 근데 왜 이 글을 쓰는지 모르겠더라고요. 흥미로워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이것을 칼럼으로 기록할 가치가 있을까 싶었어요.
그러다가 커피 한 잔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다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어떤 단어가요.
'유연함'
이슬아 작가의 유튜브를 보고서 깨달은 것이 있었어요. 그녀가 말하길 뭐든 기록으로 남겨둬야 누군가가 봐준다, 고 하더라고요. 실력이 형편없는 것 같아도 꾸준히 해야 한다고요. 특히 콘텐츠 창작자는 그래야 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생각해 봤죠. 그럼 나는 어떠한가.
저는요. 소설을 쓰고 싶어서 소설'만' 썼어요. 시나리오나 에세이 같은 것은 저질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지금은 물론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만요.
바뀌게 된 이유는요. 남는 장사가 아니었어요. 소설가 혹은 작가로 남게 된다면 그것은 본인의 희망사항으로만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대중이 선택해야 하고, 출판사가 인정해야 하죠. 그래야 커리어가 생기고 밥벌이도 될 수 있겠죠. 그런데 저는 왜 이걸 빼먹고 있었을까요.
제 결론은 '유연함'이 결여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어요. 실제 세상과 제가 원하는 세상과는 매치가 되기 힘들잖아요. 가끔씩 맞붙는 경우가 있죠.
좋은 노래, 좋은 영화, 좋은 대화, 좋은 사람이 있을 때는 보통 내가 바라보는 세상과 실제 세상이 잘 맞아떨어지더라고요.
하지만 그 외의 아마도 90%의 현실세상은 그렇지 못하죠. 저는 이걸 까먹었던 것입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고요. 더 솔직히 말하면 멍청했던 것이고요. 더 솔직히 말하면 진짜 현실은 저를 자극시키지 못할 만큼 지루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솔직하게 내면과 현실을 마주할 준비 조차 하지 못했던 거죠. 그러니 유연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유연함을 발휘하기도 전에 부끄러움이 느껴지고, 비효율적이라 생각하고, 자존감도 내려갈 것 같은 두려움과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이성적 판단 등과 같은 바리케이드가 너무 많이 있더라고요.
어느 시점에선가 하나씩 벗겨나가긴 했는데요. 그러니까 유연함이라는 것은 그 바리케이드를 거쳐야지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건 나름 제게 있어 혁명적이더군요. 그러니 바리케이드가 쳐진 길목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도로를 벗어나 자갈밭이든 진흙밭이든 아직 '도로'라고 칭하지 않은 공간들이 보이더라고요. 기호학? 뭐 그런 느낌? 조금 섞였는데 이해가 가실까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유연함이란 참 귀하고 비싼 것 같아요.
이슬아 작가가 2018년부터 일간칼럼을 쓴 것은 정말이지 엄청난 일이라 생각해요. 그런 체력은 갑자기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최대한 솔직하게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자신과 마주쳐야 가능한 일 같아요. 이슬아 파이팅까진 아니지만, 저기 멀리 한강다리를 건너, 남산 자락 밑 편의점에서 꿈틀이를 씹고 있는 한 인간이 참 좋아하고 있다고 전해주실래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한가요. 아무튼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