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자주 들으면서도 음악에 대한 글은 하나도 쓰지 못하고 있는 걸 알았다.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니 내가 글로 옮기기에 음악은 너무나 살아 있고, 추상적이며, 주관적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말은 글로 옮겨 보았더니 글이 다른 사람 보여주기엔 너무나 추상적이며 주관적이더라는 뜻이다. (고백하자면 잠꼬대 같은 소리라는 말을 순화한 것이다.)
아무튼, 음악에 대해 쓰는 것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 계속 변명해 보자면 이렇다. 예를 들어 핑크 플로이드의 <Atom Heart Mother>라는 앨범을 듣고 글을 쓴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또 다른 내가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다면 이렇게 시작할 것 같다.
처음 그 곡을 듣던 날이 생각난다. 첫 곡을 재생하고부터 40분이 마치 10분처럼 지나버린다. 잠시 적막이 찾아오고, 이제 모두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즈음, 조용한 공간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도꼭지에서 한 방울씩 새는 규칙적인 물소리에 집중하고 있다 보면, 바닥에 슬리퍼 끌리는 소리와 아침 식사에 대해 생각하는 (아마도 머릿속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온다. 물방울 소리는 여전히 공간 속에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다가 ‘마멀레이드’라는 말소리가 한 번, 두 번 들려오는 순간, 지금껏 듣고 있던 것이 음악이었다는 걸 깨닫고 만다. 앨범의 마지막 곡 <Alan’s Psychedelic Breakfast>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주전자에 물 올리는 소리와 성냥 긋는 소리, 낮게 내려앉는 목소리와 그릇 부딪치는 소리, 베이컨을 굽는 소리, 커피를 마시고 음식을 먹는 소리, 모든 것이 물방울의 규칙적인 리듬 속에서 이미 음악이었다. (……)
그렇게 한 문단을 쓰고 나서는 어떤 말로도 이 곡에 대해 더는 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음악을 듣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떻게 이게 음악이 되는가’라는 감탄 말고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가장 높은 차원의 예술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언어와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전형적인 음악의 틀을 깨부순 이 곡을 어떻게 한 번 글로 표현해 보려는 시도는 물에 비친 보름달을 담아가려고 물그릇을 애지중지 이고 가는 일과 비슷하게 보인다. 애초에 틀에 담기지 않은 것을 틀에 박힌 글을 쓰는 자가 서술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말할 수 있는 도(道, Tao)는 도가 아니’라는 <<도덕경>>식으로 생각해 보면 핑크 플로이드의 <Alan’s Psychedelic Breakfast>는 그 자체로서 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곡을 듣고 있다 보면 예술의 경지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에 급을 나누자는 소리는 아니고, 누구에게나 그런 예술 작품 하나쯤 있지 않나. 빛의 세계에 속한다고 믿어지는 작품들. 누군가는 동경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천재들의 세계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고, 도교식으로 보면 신선들의 세계에 들은 것 같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런 천재들은 음악뿐 아니라 인간이 하는 일의 모든 분야에 존재하는데, 나름대로 지켜본 결과 찾은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그게 음악이든, 글이든, 다른 무엇이든, 꼭 그걸 갖고 노는 것만 같다는 것이다. 음악 이야기를 하던 중이니까 음악으로 예를 들자면, 마치 음악 바깥의, 음악보다 더 큰 세계에서 음악을 갖고 노는 것처럼 보인다고나 할까.
며칠 전에는 체스 역사에서 유명한 스미슬로프의 게임 중 하나를 구경했다. 엔드 게임에 강한 선수로 유명했던 바실리 스미슬로프는 ‘더 핸드’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졌다. 그의 게임 스타일을 보면 특별히 공격적이거나 위협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조금씩 상대의 계획을 차단하고, 체스 보드 위의 말들을 좀 더 좋은 위치에 배치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상대 선수로서는 이미 이 게임은 전부 스미슬로프가 계획하는 대로 흘러가 버렸으며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고 마는, 극히 단순하게 말해서 체스 천재였던 것. 더 핸드라는 별명은 어디에 말을 내려놓을지 그의 손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것인데, 그걸 보면 스미슬로프가 게임을 쉽게 쉽게 했다는 걸, 적어도 그걸 본 사람들 눈에는 그래 보였다는 걸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도교 사상의 정수는 ‘무위(無爲)’라고 할 수 있다. 무위의 마음으로 사는 일을 영어로는 ‘doing not-doing’(‘하지 않음’을 하는 것)’이라고 풀이하는데, 나는 그 말을 ‘애쓰지 말라’는 뜻으로 듣곤 한다. 그렇다면 스미슬로프가 추구했던 체스 역시 지극히 도교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손이 알아서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은 머리를 싸매고 애쓰는 사람에게 하지는 않으니까.
애쓴다는 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삶의 흐름(flow)을 내 마음에 드는 대로 바꾸려는 일과 같다. 먼지 한 톨이 우주의 흐름을 바꾸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흐름에 몸을 맡기는 일은 스스로가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다 보면 알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흘러가는 일이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걸. 그러다가 스스로 물결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순간, 역설적으로 물결을 통제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과 스미슬로프의 게임은 나에게 예술이다. 드러내놓고 주관적으로 말하자면 최고의 경지에 이른 예술이라고 생각한달까. 그러고 보니 음악과 체스, 둘 다 영어로는 동사 ‘play’를 쓴다. 재미있게 노는 마음일 때 가장 높은 경지의 예술을 창작할 수 있다는 오래된 선인의 지혜 같은 것이 단어의 나이테에 남아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건 아닐까. 그 분명한 비밀을 오늘을 사는 누군가가 알아채길 바라면서 물결처럼 흐르고 흘러왔는지도.